• 문화일보 5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윤창중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유신의 창녀’란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얼마전 북한 노동당 산하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운영하는 웹사이트‘우리민족끼리’에서다. ‘한나라당 박살내자’라는 연재 풍자시의 제1편, 효녀. “저주받은 아비 뒤를 기를 쓰고 따르는 갸륵한 효녀야, 아비를 개처럼 쏘아죽인 미국에 치마폭을 들어 보이는 더러운 창녀야 유신 창녀야….” 북한은 올해들어 남쪽의 ‘좌파·친북·반미세력’을 향해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한 ‘반(反)보수연합전선’ 구축을 행동 강령으로 띄우며 박근혜와 한나라당을 주적으로 삼아 이런 악담을 쏟아붓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는 역시 침묵했고 한나라당내 120명이 넘는 숱한 금배지들 단 한사람 찍 소리조차 못냈다. 왜?

    한나라당은 말같지 않은 것에 ‘전략적 무대응’을 한 것이라고 변명하고 싶겠지만 사실 저류에는 북한 문제에 대해 본능적으로 전율하지 않는 박근혜 특유의 ‘품격 정치’ 때문이다. 박근혜는 뮤지컬 ‘요덕 스토리’를 관람한 뒤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우리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게 제1야당 대표로서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의 표현인가. 3시간의 공연 내내 관객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분명 보았다면 자기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요덕 스토리’를 단 한사람도 관람하지 않고 방해만 한 노무현 정권한테 뭘 더 촉구한다는 것인지. 북한 인권의 참상을 눈과 귀로 확인하고서도 자기 절제력을 잃지 않는 제1야당 대표의 정신력은 실로 보통 관객보다는 놀랍다. 위폐 문제에 대해서도 박근혜는 주연이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원칙론만 펴고 있다.

    그저 돌다리를 수도 없이 두드리다가도 결국 건너가지 않고 돌아가버리는 소심증, 누구한테든 찍히면 손해보니 대충 넘어가는 대기만성형 눈치병과 무기력증 등등. ‘한나라당병(病)’의 근본 원인은 ‘과연 북한과 김정일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 내부의 통일된 의견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과 김정일’을 주적으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좌파·친북·반미세력도 표는 표니까 적당히 감싸고 갈 것인지에 대한 명쾌한 인식이 없다. 박근혜부터 자신이 김정일의 ‘남쪽 대항마’라는 치열한 인식을 갖고 피가 거꾸로 솟지 않기 때문이다.

    한명숙 총리 후보에 대해 억척빼기처럼 ‘사상검증’을 해야 할 사람도 바로 박근혜다. 한명숙에 대한 검증의 검자만 꺼내도 여성 차별이니 색깔론이니 매도 당하는 상황에서 제1야당 대표, 더더욱 여성 정치인이기 때문에 정치 생명을 걸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김병준이냐 한명숙이냐 선택하라’고 메시지를 던졌을 때 ‘두 사람 모두 안된다’고 ‘원점 재고’를 공론화했어야 했다. 한명숙의 대북·대미관을 모르고 있었는가. 김병준만 이해찬의 복사판이라며 반대하다 한명숙을 지명하니 사상 검증 얘기를 꺼냈다가 색깔론 한 방에 나가 떨어지고 당적만 문제삼으며 뒤땅을 치고 있다.

    한명숙은 박근혜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의 그늘 밑에서 성장한 보수 지향적, 과거 지향적 정치가”라고 한 적이 있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국가 정체성을 분열적이고 수구적인 색깔론으로 포장해 국민 분열을 획책하고 선동하는 박 대표는 모순된 역사관으로 전범을 참배하며 동양의 평화를 외치는 고이즈미와 닮았다”고 야멸차게 말하기도 했다. ‘한명숙 총리’에 꼼짝못할 한나라당의 모습이 벌써 떠오른다.

    노 대통령은 총리 지명 전 4당 원내 대표들과 만나 “야당이 욕은 하면서도 웬만한 법은 다 통과시켜 주셨다”고 한나라당에 모욕이 될 극찬을 했다. 박근혜 대표를 만만하게 보기 때문에 대연정과 같은 치욕적인 제의를 한 노 대통령의 심중이 그대로 보인다. 김정일에게 밀리고, 노 대통령에게 밀리고, 그러다보니 한 줌도 안되는 좌파·친북·반미 세력에 밀리는 ‘후퇴 반복의 법칙’이다. 박근혜와 한나라당은 저 북한의 인권 상황에 기적을 창출하고 대한민국의 일탈에 몸을 던져 막으려는 의지가 없다면, 차라리 야당을 포기하고 노 정권과 지금이라도 연정을 하는 것이 그나마 나은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