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시 2002년 대선이 전자개표기 조작에 의한 부정선거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믿기지 않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 ‘대한민국 수호 범국민연합(대표 정창화 목사, 이하 국민연합)’이라는 단체는 지난해 10월부터 이런 주장을 담은 광고를 중앙일간지에 실어왔다.

    사실이라면 이것만큼 특종이 없다. 아니 이건 특종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당선 자체를 부정하는 사건인만큼 내란이 일어나도 당연한 사안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확실한 근거가 없었고 이를 다루어주는 언론도 없었다. 뉴데일리도 이를 다루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들이 폭탄선언을 했다. 27일 전자개표기 조작 사건에 연루된 전 국가정보원 직원 4명을 대동하고 기자회견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오 마이 갓! 

    이날 급하게 오전 마감을 끝낸 기자는 '무려' 5500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택시를 타고 서울 마포에서 정동 세실레스토랑까지 날아갔다. ‘중요하고도 역사적인’ 사실을 한마디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 때문에 큰 돈 썼다. ‘와, 드디어 뭔가 터지는건가?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었나 보다’는 생각을 안고 말이다.

    세실레스토랑에 들어서니 과연 대단했다. MBC, KBS, 미국 CBS, AP통신, 인터넷 독립신문 등 수많은 언론사 기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창화 대표의 발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100여명의 일반 시민들도 레스토랑을 빽빽히 채웠다.

    그러나 정 대표의 첫마디는 “국정원 직원이 못나온다”는 것. 아니 이것이 무슨 ‘영구없다’ 시츄에이션?

    정 대표는 국정원 직원들을 어제밤까지 설득했지만 이들이 ▲기자회견장이 ‘안전한’ 교회가 아니라는 점 ▲보도를 잘 해주지 않는 국내 언론보다 외신을 신뢰했으나 이날 외신의 취재가 여의치 않았고(외신기자들이 이날 개성공단을 방문했다고 한다) ▲세실레스토랑은 기자회견 후 이동로 봉쇄가 쉬워 안전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기자회견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이후 ‘기자회견’이 아닌 정 대표의 ‘강연 및 연설’이 이어졌다. 무려 한시간 반 가량이나! 

    현직 목사라는 분이 교회 하나 못 빌린다는게 말이 되는가. 또 외신기자들이 개성공단을 방문하면 한국에는 외신 기자들이 한명도 안남아 있다는 말인가. 핑계치고는 참 약했다. 

    참다못한 독립신문 신혜식 대표가 마이크를 들고 한마디를 했다. “전 국정원 직원이 안나오겠다고 한다면 멱살이라도 끌고 왔어야 했던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인 것. 그동안 독립신문을 통해 전자개표기 문제를 제기해왔던 그였기에 실망감도 대단했을 것이다.

    5500원이 아까웠던 기자도 한마디가 꼭 하고 싶었다. 그런데 워낙 목소리를 높이던 정 대표는 시간을 잘 주지 않았다. 결국 손을 들고 발언기회를 얻었다. 기자회견장에서 기자가 말을 못하는 데도 처음이었다.

    ‘국내 언론은 불신하고 외신은 신뢰하면서 왜 국내 언론에 보도자료를 뿌렸는지 모르겠다. 혹 무산이 됐더라도 아침에 기자회견이 무산됐다고 팩스라도 한장 넣어주지 그랬느냐. 그리고 전 국정원 직원들을 다시 설득해서 자리를 마련하지 그랬느냐’는 말. 그리고 몇마디 더했다. “전 국정원 직원들이 이 발언으로 피해를 입는다면 뉴데일리가 제일 먼저 제일 크게 쓰겠다”고. “국내 언론도 설득시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외신을 설득시키겠느냐”는 질문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날 ‘쫌’ 열받은 기자는 혈압 때문에 뒷목을 잡으며 기자회견장을 빠져나왔다. 나오는 순간 ‘범 우파 분열을 위해 좌파 프락치가 벌인 황당한 일은 아닐까?’라는 망상까지 스쳐갔다.  

    이날 국민연합이 저지른 잘못은 세가지다.

    첫째, 범 우파 가슴에 깊고도 푸른 멍을 남겨버렸다. 좌파들이 본다면 ‘거봐 웃기는 소리할 줄 알았어’라는 비아냥을 들어도 대꾸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버렸다.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을 우려하고 비판해온 우파들이 졸지에 ‘수구꼴통’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전자개표기 조작 운운으로 노 대통령의 당선 자체를 무효화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잘 알겠다. 그런 마음으로 전자개표기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워온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국민연합은 이런 사람들의 순진한 기대심에 상처를 줬다. 

    둘째, 국내 언론은 불신한다고? 그럼 취재 요구 팩스는 왜 보냈는지? 이날 말도 안되는 기자회견 때문에 국민연합에게 남아있던 일말의 신뢰가 산산히 공중분해 돼버렸다. 이제 국민연합에서 어떤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믿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왜 언론이 안다루어주느냐고 불평 불만을 토로하기 전에 왜 안쓰는지 이유를 좀 생각해 보라.

    셋째, 혹시 어쩌면 정말로 있을지 모를 전자개표기 문제를 이제 사장시켜 버렸다는 점. 앞으로 어떤 사람이든 ‘전자개표기’라는 말을 들으면 고개를 저을 것이다. 정말 문제가 있더라도 ‘또 이상한 소리’한다며 외면해 버리게 만들었다는 소리다. 이제 이 단체에서 하는 주장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맏을 사람이 없게 됐다.

    본 기자는 ‘보수꼴통’이라는 소리를 정말 싫어라 한다. 보수는 대한민국의 근간이고 뿌리라고 생각한다. 추운 날씨에도 거리에 나와 태극기를 흔드는 어르신들을 정말 존경한다. 그런데 이날은 정말 ‘보수 ㄲ…’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더라. 이래서 우파가 욕을 먹나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이제껏 내가 무얼 위해 취재를 했을까 라는 슬픈 생각도 들었다. 쩝.

    마지막으로 정창화 대표님! 정말 전 국정원 직원들이 나타난다면 성심성의껏 취재를 하겠습니다. 밤새서라도 하겠습니다. 전 국정원 직원들 설득 좀 잘 해주십시오. 부탁 드립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