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20일자 오피니언면 '오늘과 내일'란에 이 신문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이 쓴 'DJ 재방북, 자존심도 없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2000년 6월 15일자로 되어 있는 ‘남북공동선언’의 마지막 대목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 밑에 호방한 글씨로 서명했다. 그로부터 5년 반이나 흘렀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리라는 조짐은 어디에도 없다. ‘적절한 시기’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치 못했다.

    김 위원장이 서울을 답방하지 않는다면 ‘남북공동선언’은 ‘반쪽 선언’이자, ‘미완의 선언’에 불과하다. DJ가 4월 하순경 북한을 다시 방문하려는 것은 생전에 그런 평가를 바꿔 보고 싶다는 ‘미련’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DJ의 재방북은 대박을 터뜨린 영화의 속편을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DJ의 방북에 대해 야당에서는 5·31 지방선거에 악용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거액 제공설을 거론하기도 하고, 연방제를 논의할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데 있다.

    DJ의 방북은 국가의 자존심은 물론이고, DJ 본인의 자존심까지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다. 김 위원장은 바로 DJ 앞에서 남한과 세계를 향해 서울을 방문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다. 그러나 그런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렸다. DJ 스스로도 “한마디 말도 없이 안 오고 있는데, 못 오면 못 온다고 말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2005년 6월 15일, KBS특별대담)고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던가. 그 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가고 싶다고 했는데도, 가타부타 말이 없는 북한 당국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애걸하다시피 재방북을 추진할 이유가 없다.

    먼저 김 위원장이 답방하는 것이 순리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서울에 오지 않을 것이다. 못 온다는 표현이 정확할지 모르겠다. 정부 당국자들이 남북정상회담의 연내 개최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장소에 대해서는 유연한 입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김 위원장의 곤혹스러운 처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외교의 기본인 상호주의 원칙까지 포기해 가며 장소마저도 북한 측에 양보하겠다는 뜻이다. 그런 마당에 DJ가 또다시 북한까지 찾아가는 것은 지나친 저자세다.

    일각에서는 DJ가 방북하면 노무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정상회담이 성사되도록 터 닦기를 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정상회담 추진은 당연히 현 정부가 해야 한다. 그런 중대사를 DJ에게 맡기는 것은 이 정부가 무능하다는 말밖에 안된다.

    노 대통령이나 여당 측이 DJ에게 방북을 권유했다고 해서 DJ가 들고 돌아올 보따리에 기대를 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정부는 DJ가 특사는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일부 정부 당국자들도 “DJ가 방북해서 뭘 할 수 있겠느냐” “본인이 가겠다는데 막을 수야 없는 것 아니냐”고 속내를 내보인다. 청와대 안팎의 386 실세들은 노 대통령이 얻어야 할 성과를 DJ에게 뺏기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DJ 방북이 떨어져 나간 호남 민심을 돌리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정도지,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DJ 측은 북한에 가서 무엇을 논의할지 아직 밝히지 않고 있다. 정 가고 싶다면 방북 목적과 협상 과정 등을 소상히 밝히고 국민적 합의를 얻어야 한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만약 북한이 원치 않아 그럴 수 없다면 DJ도, 정부도 방북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밀실 논의를 통해 DJ를 방북시킬 만큼 현재 남북간에 위급한 현안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다시 이어진 경의선을 타고 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그러나 첫 열차에 꼭 DJ가 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열차에는 노정치가의 개인적 미련이 아니라 통일 한국을 지향하는 국민의 염원을 실어야 한다. 그게 국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