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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세력,30년전 정신세계못벗어나"

입력 2006-02-10 09:03 | 수정 2009-04-29 18:46
80년대 운동권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던 ‘해방 전후사의 인식(한길사, 이하 해전사)’의 좌편향된 역사서술을 바로잡는 책,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 이하 재인식)’이 8일 출간됐다.

현 집권 세력과 386세대의 역사의식에 큰 영향을 끼친 해전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시각을 민중사관 중심으로 전환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책이다. 그러나 출간된지 30여년이 지난 지금, 학계는 해전사의 ‘민족지상주의’와 ‘민중혁명론’ 등의 주장에 대해 많은 문제를 제기해왔다. 재인식은 이런 학자들의 논문 28편을 담아 묶은 책이다. 재인식은 근현대사를 보다 다각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한 책이다.

얼핏 해전사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재인식은 1979년 해전사가 출간될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을 30여년만에 정리해 비교사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책이다.

뉴데일리는 9일 재인식을 탄생시킨 편집위원 4인(박지향 서울대 서양사, 김철 연세대 국문학,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 이영훈 서울대 경제사)중 한 명인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나 재인식 출간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날 박 교수는 “재인식은 좌익적 시각의 해전사를 단순히 우익적 시각으로 해석한 책이 아니다”며 “우리는 해전사 출간 당시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수많은 역사적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해전사의 ‘수직 이동(왼쪽에서 오른쪽)’ 판이 아닌 수직상승, 곧 업그레이드 판”이라고 말했다. 그는 “재인식에 참여한 학자중에는 좌파 성향의 학자들도 많다. 단순히 재인식을 ‘반 해전사’라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해전사에 대해서도 긍정적이고 애정어린 평가를 내렸다. 그는 “과거 해전사의 필진들은 대단한 용기와 위험을 감수하며 책을 만들었다. 해전사의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으로 다가섰고 사람들에게 피 끓는 열정을 안겨줬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30년전과 다르다. 과거 해전사의 수혜를 입은 사람들이 아직도 당시 정신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옳은 역사 인식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역사는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복잡하고 구불구불한 강 같다”며 “역사에서는 불행하게 희생된 사람도 있고 못된 사람도 이득을 취할 수 있다. 학자란 그런 역사의 복잡한 면을 가슴 아프지만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과거사 청산 문제와 관련 “역사나 인간의 삶은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며 “법을 제정해 과거사 청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하에 ‘누가 친일을 했는가’, ‘친일 형태가 어땠는가’를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6.25 전쟁은 통일내전’이라는 인터넷 매체 기고문으로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직에서 직위해제된 강정구씨에 대해 “1945년 당시의 상황을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본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학자라면 당시의 대중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분석한 후 결론을 내려야 한다. 해방직후의 사회주의와 현재의 사회주의의 개념을 똑같이 적용한다면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언했다.

재인식은 출간되기까지 여러 출판사를 전전하는 ‘수모’아닌 수모를 겪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출판사들이 좌파 성향의 독자들의 반발을 우려해 출간을 꺼렸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과거 군부독재 시절에는 위에서 ‘책을 내지 마라’고 명령을 했다. 반면 요즘에는 자기가 알아서 ‘검열’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재인식의 출간을 두고 여야 정치인들이 각기 ‘해전사에 맞서는 보수세력의 움직임’,‘편향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게 됐다’고 엇갈린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시각으로 재인식을 평가하지 말라”며 “재인식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단 한번이라도 책을 읽어보고 말을 하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다음은 박지향 교수와의 일문일답>


▲재인식을 출간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출판사마다 편집 원칙이 있다. 출판사들이 그 원칙에 따라 필자들의 원고를 수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내가 외국 출장을 나간 사이 이메일로 계약 파기를 알려온 출판사도 있었다. 손해배상청구소송 등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지만 안할 생각이다.

출간 과정에서 느낀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기 검열이 굉장히 강하다는 점이다. 과거 군부독재 시대였으면 이런 책은 내지 말라며 위로부터 명령이 내려왔을 것이다. 지금은 이제 알아서 검열을 해버리는 시대같다.

▲누구를 대상으로 재인식을 출판하게 됐나

-요즘 학생들은 역사에 관심이 전혀 없다. 우리가 주 독자층으로 삼은 건 바로 위정자들이었다. 이 사람들의 사고가 과거 해전사가 제시한 역사인식을 답습하는 것에 문제점을 느껴 출간하게 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나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건 옳은 역사 인식이 아니다. 

▲옳은 역사인식이란 무엇인가

-역사란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전진하는게 아니다. 역사는 굉장히 복잡하고 얽힌 강 같다. 역사속에는 불행하게 희생된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못된 사람이 이득을 취할 수도 있다. 역사의 복잡한 면을 우리 학자들은 가슴 아프지만 그대로 보여줄 수 밖에 없다. 이건 역사학자의 임무다.

역사가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말자는 건 아니다. 현재와 미래를 잘 살기 위해서는 과거를 잘 알아야 한다. 과거 그 자체가 가치가 있어 배우자는 건 아니다. 역사가의 임무, 학자의 임무는 과거를 좀 더 사실에 가깝게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우리는 민족의 분단이나 과거사의 모순은 분명히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모순 극복을 해야하니 이걸 읽고 이렇게 행동하라’고 강조하는 건 역사가 아니다.

해전사 1권이 딱 그랬다. ‘민족 모순은 극복해야 하고 민족 통일이 우리의 지상 과제’라는 전제를 두고 다른 가치와 목표는 종속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럴 경우 개인은 말살당한다. 거대 담론이 개인의 말살에 일조를 하고 있다고 본다. 특히 우리는 민족이나 국가라는 가치 때문에 개인의 권리가 많이 침해되어왔다.

개인의 가치판단, 개인의 자유, 더 나은 개인을 만들기 위한 정책이 중요하지 국가가 나서서 개인을 만든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해전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1979년 해전사 1권이 출간된 후 1989년 마지막 6권이 나오면서 다양한 목소리가 담기게 됐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해전사 하면 1권을 떠올린다. 현재 권력의 중추에 있는 사람들은 이 1권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1권은 ‘민족 통일, 민족모순 극복’을 위해 모든 것을 여기에 올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학문의 엄정함이나 개인의 안녕, 자유 이런 것들은 나중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런식의 사고방식이 80년대에는 호소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피끓는 열정을 안겨준 것도 안다.

그러나 세상은 이제 그렇지 않다. 위정자들이 그 정신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북한과의 대화를 위해 북한 인권문제를 거론하면 안된다든가 ‘우리민족끼리’ 잘하면 통일이 된다, 통일이 되면 북한 핵은 우리 것이 된다는 것은 지독한 환상이다. 위정자들이 국민을 오도하고 있다. ‘우리민족끼리’가 현실정치에서 상당한 힘을 얻고 있어 우려된다.

▲해전사가 ‘민족 통일, 민족모순 극복’을 위해 사실 왜곡을 했다는 것인가

-1권을 낸 분들이 너무 다급한 마음에 책을 냈다. 중요한 역사적 소명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주장이 너무 앞섰다고 생각한다. 학문은 넓고 풍부한 자료를 제시해 독자들에게 납득을 시켜야 한다. 

이런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주장이 더 강했던 것이 해전사다. 해전사 이후 후속 연구를 진행하면서 사실이 아닌 것을 밝혀내고 그걸 재인식으로 엮은 것이다. 역사는 굉장히 달리 볼 수 있다.  

▲일제시대 최초의 여류 비행사인 박경원의 삶을 다룬 영화 ‘청연’이 친일 논란으로 일찍 막을 내렸다

-누가 이런 우스개 소리를 하더라.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나가고 일본에 금메달을 안겨준 손기정만한 친일파가 어딨느냐고. 손기정이 친일파라 마라톤에 나갔겠느냐. 청연의 주제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이런 영화를 사장시켜버렸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사고가 아주 경직됐다는 것을 뜻한다. 젊은이들이 영화의 주된 팬인데 젊은이들도 이런 경직된 사고를 가졌다는 말 아니냐.

인간의 삶이나 역사는 이분법적으로 나뉘는게 아니다. 제발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춘원 이광수도 친일을 하고 싶어 했겠느냐. 이광수도 안창호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이광수는 일제 강점기하에서 민족을 어떻게든 갱생시켜보고자 노력한 인물이다. 그래서 일본의 힘을 빌려서라도 지식교육을 하자던 실용주의자였다.

재인식에서는 식민지시대를 살아갔던 지식인 이광수의 복잡한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있다. 잣대를 적용해 단죄하지 말고 당시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이해하자. 그런 다음 비판을 하자는 얘기다.

▲과거사 청산 움직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과거사 청산은 언젠가 해야 한다. 그러나 법을 제정해 과거사 청산을 하는 것은 반대다.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선 알아야 한다. 

일제 강점기 하에서 어떤 사람들이 친일을 했고 친일 행태가 어땠는지, 왜 했는지가 중요하다. 이런 것을 다면적으로, 다층적으로 연구하고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평가해야 한다.

지금 그들을 단죄 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다.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아는게 더 중요하다. 어떤 관직 이상은 친일파, 그 아래는 비 친일파로 나눈다는건 어불성설이다.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강정구씨의 ‘6.25 전쟁은 통일내전’이라는 발언이 문제가 돼 직위해제됐다

-강씨가 “1946년 미 군정 여론조사 결과 공산 사회주의 지지세력이 77%였고 자본주의 지지는 겨우 14%였다”며 “대다수가 원하면 그 체제를 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 글을 봤다.

이 여론조사 결과는 나도 1990년 미국 워싱턴에 가서 본 적이 있다. 아마 국내에서 내가 제일 먼저 봤을 것이다. 그의 주장에는 두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응답 비율을 결합해 버린 점. 이건 확실히 틀린 것이다. 둘째 당시 일반 대중은 사회주의가 뭔지 공산주의가 뭔지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 현재의 마인드로 해방직후를 해석하는 것은 역사가가 할 일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이 인식했던 사회주의가 무엇이었는지 짚어주는 것이 학자의 몫이다. 학자가 단순히 말을 받아치는 사람은 아니지 않는가. 해방직후의 사회주의에 현재의 사회주의 개념을 적용한 그의 발언은 역사 인식이 없다고 밖에 볼 수 없다.

학문의 자유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러나 정확한 학문 지식을 전달하며 주장을 제기해야지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면서 학문의 자유를 강요하는 건 말이 안된다.

▲한 일간지가 재인식을 ‘뉴라이트판 해전사’라고 설명했다

박지향 교수 약력
-1953년 서울생 
-1975년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1978년 미국 뉴욕주립대 대학원 박사(유럽사학 전공)
-1985년~1987년 미국 뉴욕 프랫대 교수 
-1987년~1992년 인하대 문과대 교수 
-1992년부터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2003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저서: 일그러진 근대(푸른역사), 영웅만들기(휴머니스트), 슬픈 아일랜드(새물결) 등이 있음


-뉴라이트판 해전사는 절대로 아니다. 100번이라도 강조하고 싶다. 우리 책은 해전사의 좌파적인 시각을 우파적 입장해서 재해석한 책이 절대로 아니다. 필진 28명중 좌파도 있다. 우리는 수평 이동이 아닌 질적으로 도약한 작업을 했다고 자부한다.

이 책을 구상한게 2004년 9월이다. 뉴라이트는 이보다 나중에 시작되지 않았나. 편집위원중에 뉴라이트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신념에 의해 일하는 것을 어쩌겠나. 이 책은 절대로 뉴라이트판 해전사가 아니다.

▲책이 출간되자 여야 정치인들의 반응이 엇갈렸는데

-정치적으로 이 책을 이용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또 반박을 하려면 제발 읽어보고 반박을 해 달라.

▲재인식의 후속을 계속 낼 생각인가

-60년대와 70년대의 역사 문제도 계속 다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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