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1일자 오피니언면에 이화여대 정외과 이성형 교수가 쓴 시론 '바첼렛 당선의 의미'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칠레 정치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고 한다. 여성.사회주의자.이혼녀.불가지론자 바첼렛이 보수적인 가톨릭 사회인 칠레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외신은 호들갑을 떤다. 국내 언론은 또 중도좌파가 당선돼 중남미가 좌파의 대륙으로 바뀌어 간다고 헤드라인을 뽑는다. 모두 잘못 짚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지난 42년간 칠레 정치를 억누르고 있던 피노체트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 최초의 선거였다는 점이다. 결선투표에서 우파 후보로 나와 패배한 기업인 출신 피녜라 후보는 군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민주적 우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익은 내부 분열 때문에 이번에도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42년간 선거에서 찬밥 신세다.

    바첼렛의 당선은 우파 정치세력의 여론조사기관도 오래전에 예견했다. 네 번째 연속으로 집권하는 콘세르타시온 여당연립 세력은 개방경제 기조 아래 연평균 6~7%(1990~2000년)의 높은 성장률을 유지해 훌륭한 경제 관리자로 자리 잡았다. 2000년대 초기에 어려운 시점을 거쳐 2005년에 다시 7%에 달하는 성장률을 회복했다. 특히 중국 특수로 인한 구리 가격의 상승으로 수출액은 지난 3년간 두 배로 증가했고, 지난해에는 400억 달러를 돌파했다. 퇴임 대통령 라고스의 인기도는 75%에 달할 정도로 높다. 이런 변수들로 인해 바첼렛은 54%의 지지도를 확보해 쉽게 당선됐다.

    언론들은 바첼렛 당선의 상징성을 너무 강조한다. 바첼렛도 선거전에서 "나는 여자고 사회주의자며, 이혼녀에다 불가지론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칠레 사람 누구도 이 말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선거전 내내 한 번도 쟁점화된 적이 없었다. 불과 2년 전에 이혼법이 통과될 정도로 보수적으로 보이는 칠레 사회이지만 이미 성별 균열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바첼렛은 남성(45%)과 여성(47%)에게서 골고루 득표했다. '마초주의 사회' 칠레는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이미 사라졌다. 불신자 대통령은 1940년, 70년, 그리고 리카르도 라고스에 이어 네 번째다. 그렇다고 가톨릭 교회가 반대운동을 하거나 성명을 내는 것도 아니다. 가톨릭과 신교 신자들의 표도 좌우에 골고루 분포돼 있다. 종교도 투표 행태에 큰 변수가 되지 못한다. 칠레의 대통령 선거는 이제 국사를 잘 운영할 선량한 관리자를 뽑는 통과의례가 되었다. 

    그녀가 사회주의자이니까 당선은 곧 남미 좌파정부 도미노 현상의 일환일 거라고 국내 신문들은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틀렸다. 이념지형 자체가 우경화돼 있는 칠레의 경우 좌파는 우리나라의 중도우파와 다를 바 없다. 칠레 사회당은 한국의 열린우리당보다 자유주의적이고 덜 개혁적이다. 사회당을 포함한 칠레 여당연립은 피노체트가 만든 자유주의 경제질서의 기본틀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이들이 신경을 쓰는 사회개혁이란 주로 연금과 의료보험 제도를 손질하고 교육제도에서 약자의 불평등을 교정하는 수준이다. 지니계수가 0.55가 될 정도로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한데도 말이다. 그래서 젊은 층들은 "그 물에 그 밥"이라고 투표에 불참한다. 18세에서 29세에 이르는 300만 젊은이들 가운데 74%가 선거명부 등록을 하지 않았다. 

    "낙오자 없고 차별 없는 나라"를 원한다고 바첼렛 당선자가 말했지만 사회적 분배 문제에 급진적 처방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신임 정부가 남미의 중도좌파 정부들처럼 반미구호를 외치는 중남미 지역주의, 경제적 민족주의에 동참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미 칠레의 수출은 아시아(32%).유럽연합(25%).북미(24%)에 집중돼 있고, 남미는 겨우 6%를 차지한다. 탈남미화된 수출시장을 지닌 국가가 새삼 남미의 좌파 정부들과 보조를 맞출 까닭이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