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에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전공)가 쓴 시론 <'언론에 대한 집단 증오' 신드롬>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현 정권의 언론에 대한 집단 증오가 언제 끝날지 아득한 심정이다. 정권이 바뀌지 않으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집권세력의 줄기찬 언론구타에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다. 

    천정배 법무장관이 12일 대통령을 비판하는 신문 기고가를 향해 “×도 모르는 놈들이 대통령을 조롱한다”는, 저잣거리의 패악질에 가까운 육두문자를 퍼부었다. 그는 “(신문사 사주들이) 왜 그런 사람들을 자르지 않는지 모르겠다”고까지 말했다. 인간적 품성은 물론 장관으로서, 법률가로서의 자질을 지극히 의심케 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언론의 비판을 조롱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문제다. 남의 얘기는 듣기 싫어하는 성격적 독선이며, 언론자유의 철학과 가치에 대한 몰이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와 권력에 대한 토론, 비판, 반대, 그리고 정권교체의 주장은 민주국가에서 언론자유의 핵심이다. 미국의 연방 대법관인 윌리엄 브레넌은 1961년 “정부와 공직자에 대한 토론은 격렬하고 신랄하며 때로는 불쾌할 정도로 날카로운 공격을 포함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설령 21세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을 조롱한들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허위 사실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공직자에 대한 아무리 뼈아픈 풍자나 비판도 명예훼손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법률가인 천 장관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1850년대 남북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신문들로부터 ‘일리노이 고릴라,’ ‘사투리 투성이의 선동가,’ ‘얼빠진 강탈자’라고 묘사됐다. 그는 자주 술에 취해 있었으며 오로지 승리를 위해 수많은 군인들을 사살하라고 명령했다는 비판을 들었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은 악담과 욕설을 관용했으며 어떠한 반대 또는 비판 언론도 탄압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 수행과 자유언론 유지라는 화해하기 어려운 양자의 갈등 속에서 놀라울 정도의 자제력과 자유언론의 원칙에 대한 존경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링컨 대통령은 천 장관이나 노무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변호사이며 특히 노 대통령이 존경해 마지않는 인물이 아니던가. 왜 두 사람이 링컨 대통령의 언론관은 사숙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역사적으로 언론자유의 초석을 깔고 반석 위에 올려놓은 중요 인물들은 대부분 법률가임을 두 사람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천 장관이 신문사가 왜 기고가들을 자르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은 언론과 외부 필진의 관계를 판·검사나 군인과 같이 서열체계의 조직으로 인식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언론에 대한 기본적 지식 부족은 물론 권위주의적 발상 때문 아닌가 싶다. 외부 기고가는 신문사 사주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 선정은 언론사 내부의 자율적 논의와 의사결정체계의 결과이며 선정된 기고가도 본인이 싫으면 그만이다. 언제는 ‘족벌언론의 폐해’ 운운하더니 이제 와서 신문사 사주들에게 외부 필자들을 자르라고 하는 그 자가당착이 어이없을 뿐이다. 

    한때 민주화를 외치던 현 정권 권력자들의 언론에 대한 험한 소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통령에서부터 총리, 장관내정자, 청와대 수석 등의 언론에 대한 발언은 천 장관의 그것과 맥을 같이한다. 언론의 비판을 조금도 못 견디는 그들의 집단적 언론증오는 각종 법과 제도를 이용한 언론구타로 현실화하고 있다. 언론자유를 제한하는 가장 무서운 메커니즘으로 꼽히는 명예훼손법과 군사정권의 산물인 언론중재위원회를 최대한 활용하고 그것도 모자라 신문법까지 만들어 언론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에 공직자들의 기고를 금지하더니 이제 민간 칼럼니스트들마저 구속 운운하며 협박하고 있다. 

    언론자유 없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언론자유의 가치와 필요성에 대한 기본 인식조차 없어 보이는 참여정부 때문에 참으로 대한민국이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