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6일자 오피니언면 '이홍구 칼럼'에 이 신문 고문인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쓴 <한국 민주화 '반보(半步)의 지혜'>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정치체제의 변화는 그 방향과 속도의 함수관계에 따라 민주화에 공헌할 수도, 파탄에 이를 수도 있다. 1987년 이래 진행되어 온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과연 방향과 속도의 차원에서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지 심각한 성찰을 필요로 하는 전환점에 도달해 있는 것 같다. 

    국민의 불안과 답답함이 날로 쌓여가는 가운데 국회 운영의 파행과 대통령·여당 관계의 혼선은 민주정치에 대한 국민적 신뢰와 기대를 원천적으로 희석시키고 있다. 이렇듯 어두운 상황에선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단숨에 그 흐름을 반전시키려는 독재로의 향수가 작동할 가능성마저 걱정하게 된다. 그러기에 쉽게 깨질 수 있는 유리 항아리 같은 우리의 민주체제를 우파권위주의와 좌파모험주의의 망령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는 국민이 우리의 민주체제가 지닌 강점과 약점을 확실하게 점검해야 할 시점에 있다 하겠다.

    6월 항쟁과 6.29선언을 시발점으로 네 번의 대통령선거를 거치며 오늘에 이른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권위주의 체제로부터 비교적 순탄하게 체제 전환을 성공시킨 사례로 국제사회에서 꼽히고 있다. 그러한 긍정적 평가는 정치변화의 방향설정에서 국민적 합의가 쉽게 조성되었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우선 모든 국민이 과거로 회귀하기보다 미래로 향한 개혁을 희망하였다. 한편 오랜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남유럽이나 동유럽의 통례에서 보여준 우로부터 좌로 이동하는 사회민주주의적 방향성이 한국의 경우에도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다. 이렇듯 대다수 국민이 미래지향적·개혁지향적 방향감각을 공유하였기에 한국식 타협의 정치는 지금까지 수다한 곡절을 겪으면서도 나름대로 민주화 과정을 이끌어 온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 비교적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그 방향성 못지않게 뛰어난 속도조절의 힘으로 국민통합, 정확히는 분열 예방의 묘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네 번의 대통령선거를 돌아보자. 87년 대선에선 당연히 민주화 세력이 승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김의 분열로 36.7%를 득표한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급격한 체제변화의 충격을 최소화하고 기존세력의 집단적 소외를 예방하였다. 반면 대통령 취임 후 두 달 만에 있었던 13대 총선에서 압도적인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면서 민주화의 동력은 그대로 지탱되었다. 92년 대선을 통해 민주화운동의 기수 중 한 사람인 김영삼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한 발짝 좌로 가는 문민화를 실현했지만 이는 3당 합당이란 타협의 산물이었다. 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당선으로 한국정치의 좌향 행진이 지속되었지만 그의 승리는 DJP연립이란 좌우 합작의 결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2002년 대선의 결과는 보폭이 훨씬 큰 좌로의 이동을 가져왔지만 그 선거과정에서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던 노무현.정몽준 합작도 단순한 해프닝으로만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요컨대 한국정치의 변화가 민주화 과정의 성공적 모형으로 보이는 것은 그 변화가 과속과 과격을 피하고 타협과 공론을 존중하며 반걸음씩 전진하는 '반보의 지혜'에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2007년 대선을 향하여 요동치기 시작한 한국정치는 벌써 심상치 않은 증세를 나타내고 있다. 사학법.북한 핵과 인권 등을 둘러싼 분열과 대결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민주화 과정에서 습득한 평이한 교훈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손으로 뽑았던 역대 대통령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소수의 대통령이었다. 오직 연립과 합작, 그리고 타협을 통해서만이 국가를 운영할 수 있고 국민적 분열을 예방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절대다수의 국민에게 지지받고 있다는 환상이나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되겠다는 유아독존적인 망상은 지난날의 대통령이든, 오늘의 대통령이든, 내일의 대통령을 꿈꾸는 지망생들이든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2007년 대선은 우리 정치의 향방이 좌로의 행진을 가속시키는 계기, 그리고 우로의 방향전환 고비를 두고 국민적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국민은 어렵사리 키워온 민주체제를 정치적 과격과 과속에 노출하는 우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을 놀라게 하지 않는 '반보의 지혜'가 절실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