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 '류근일 칼럼'에 언론인 류근일씨가 쓴 '김정일의 지령'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006년은 김정일식 ‘우리 민족끼리’와 그에 반대하는 진영 사이의 더 첨예한 격돌의 한 해가 될 것이다. 김정일은 북한 관영매체들의 신년 공동사설에서 그 싸움을 이렇게 규정하고 지시한 바 있다. “남조선에서 반보수 대련합을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조선의 각계각층 인민들은 ‘신보수’의 결탁과 도전을 진보의 대련합으로 짓부셔 버리고 매국 반역집단에 종국적 파멸을 안겨야 한다.” 한마디로 2006년 남한 좌파들의 최우선적인 임무는 이른바 ‘신보수’를 초장에 박살내는 것임을 지령한 문건이다. 

    그러면서 사설은 그냥 ‘보수우익’이라 하지 않고 굳이 ‘신보수’라는 말을 썼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뉴 라이트 운동 등, 최근의 새로운 차세대 반(反)김정일 투쟁세력의 등장을 의식한 말일지도 모른다. 김정일 집단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출현 이후 남한 보수세력의 정치적 도덕적 생명력은 거의 수명을 다한 줄로 알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어느 날 갑자기 전통적 보수는 아니지만 새로운 반(反)김정일 투쟁세대가 태어나더니 제법 매서운 공격을 가해 오는 게 아닌가? 게다가 노무현 정권의 인기는 곤두박질을 치는데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자꾸만 올라갔다. 국제사회의 북한인권 비판도 거세지고….

    남한에는 이제 자기들과 맞서 싸울 인기 있는 우익이 거의 죽었다고 생각했던 김정일로서는 이것은 분명 ‘변괴’가 아닐 수 없다. 아니, 이 ‘좌파 대세’에 대드는 ‘신보수’라니? 이거 그냥 놔두었다가는 안 되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김정일은 새해 벽두부터 남한의 ‘동무’들에게 지령을 내린 것이다. “독초는 제때에 뿌리뽑아 제거해 버려야 한다” 운운하면서. 

    그런데도 노무현 정권은 이 중차대(?)한 시기에 계속 전통적 지지층으로부터도 인심을 잃어가면서 심지어는 열린우리당과도 개각이 어떠니 하며 상쟁이나 벌이고 있다. 그래서 김정일이 훈수를 둔 것이다. “(제살 뜯어먹는 다른 짓 다 그만두고) 반보수 대련합이나 빨리 하라”고. 맞는 말이다. 김정일에게 중요한 것은 노무현 정권의 ‘정치’가 아니라 남한 내부의 ‘반(反)김정일 무드’의 리바이벌일 터이니까. 

    김대중씨도 자기 입장에서 비슷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기껏 대통령 만들어 주었더니 김대중 집권시 도감청을 수사하지 않나, 자기한테 표 찍어 주었던 유권자들을 정면으로 엿 먹이지를 않나, ‘정치인 김대중’이 평생을 바쳐 끌어모은 ‘범(汎) 진보 대연합’ 진영을 하루아침에 갈라놓지를 않나…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나서기로 한 것이다. 노무현 그룹에 대해 “전통적 지지층을 복원해야 한다”고 따끔하게 충고한 것도, 그리고 다시 김정일을 찾아가기로 작정한 것도, 다 그런 ‘김대중식’ 특유의 순발력이 낳은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마치 “노무현 당신이 못하면 내가 나서겠다”는 형국이다. 

    어쩌면 금년에 있을 것으로 보이는 ‘김정일-김대중 전략회의’의 공동 대책사항의 핵심은 보지 않아도 너무나 뻔하다.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끼리’ 노선이 직면한 안팎의 도전을 극복하고 상황을 다시 압도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유리하게 대세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금년의 지방선거를 계기로 열린우리당이 지리멸렬해질 수도 있다. 미국의 북한 위조달러 수사, 북한 인권참상의 세계적인 쟁점화도 핵공갈로 막아지지 않는 골칫거리다. 그래서 이 모든 ‘불리한 상황’을 한꺼번에 뛰어넘을 메가톤급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대 이벤트를 만들어 내려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런 통일전선을 이겨내 오늘의 성공사례를 이룩했다. 이제 그 망령이 오도된 ‘민족주의’의 물살을 타고 다시 엄습하고 있다. 이것을 ‘반 김정일 대연합’으로 싸워 이기지 못하면 2006년은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가 ‘정통’이 되는 원년이 될지도 모른다. 선택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