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9일자 오피니언면 '중앙시평'란에 성균관대 정외과 김일영 교수(정치학 전공)가 쓴 '2005년 여전히 불임의 시대'라는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정권 3년차가 지나가고 있다. 역사는 2005년을 어떻게 기록할까. 편을 갈라 싸우면서 과거사만 파헤치다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 '불임(不姙)의 시기'일까, 아니면 경제가 살아나고 개혁이 풍성한 결실을 거둔 시기일까.

    노무현 정권은 어느 때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올해를 시작했다. 2004년 초 신생 열린우리당은 50석에도 못 미치는 초라한 제3당이었지만, 올 초에는 과반수가 넘는 거대 여당으로 변해 있었다. 2004년 초 탄핵으로 벼랑 끝에 몰렸던 노 대통령은 국회까지 장악한 우호적인 조건 속에서 올해를 맞았다.

    이를 반영하듯 연초에 노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만만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다. '화해와 포용'을 강조했고 '경제 살리기'에 올인하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정권의 정체성과 관계되는 '개혁'을 지속하겠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중반을 넘어서면서 노 대통령의 여유는 점차 초조함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경제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사회적 양극화는 점점 심해졌고 남북관계, 대미 및 대일관계, 노사관계, 여야관계 등 어느 것 하나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노 대통령을 초조하게 만든 것은 임기의 절반이 지났건만 정권을 대표할 만한 업적이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과(功過)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대 정권은 무언가 대표적으로 연상되는 업적이 하나씩 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 발전, 김영삼 정권의 금융실명제 실시, 김대중 정권의 남북관계 개선 등이 그 대표적 예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 하면 아직 연상되는 게 없다. 개혁을 내세웠지만 손에 잡히는 게 없고, 김영삼 정권부터 10년 이상 지속된 개혁 구호에 식상함과 피로감을 느끼는 국민이 늘고 있는 실정이다.

    정권의 임기가 아직 2년 남았는데 너무 때 이른 질문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정도면 결실을 거두지는 못해도 무언가 어렴풋이 보이는 게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과거사 정리 작업을 하지 않았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화해의 첫 단추가 될지, 분란만 가중시킬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아울러 그것이 과연 국민에게 피부에 와 닿는 업적으로 여겨질지 의문이다.

    올 하반기 노 대통령의 정치 행보에서는 이러한 초조감이 여기저기서 묻어났다. 대연정 구상의 이면에는 이러한 초조감도 작용한 듯하다. 경제.외교.대북 등 어느 것 하나 뚜렷한 진척이 없고 지지율이 날로 추락하자 노 대통령은 대연정을 통해 정치풍토라도 '적이 없는 민주주의'로 만드는 족적을 남기고 싶어한 것은 아닐까. 노 정권이 '황우석 프로젝트'를 무리하게 밀어붙인 배경에도 이런 초조감이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생명공학을 향후 한국을 먹여살릴 선도산업으로 육성했다는 업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임기 5년 중 3년을 보냈다는 점에서 노무현 정권은 인생으로 치면 중년의 끝자락에 서 있고, 계절적으로는 늦가을로 접어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쯤이면 인간적으로는 성숙함이 무르익고 계절적으로는 풍요로운 결실을 거둘 때다. 다가오는 노년을 담담히 맞으면서 쌓아둔 수확물로 겨울을 날 준비를 할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에는 이런 여유가 없는 것 같다. 저축해 둔 게 없기에 다가올 노년이 불안하고, 결실이 없기에 코앞에 닥친 겨울이 걱정되는 세밑이다. 남은 2년 동안 마무리의 여유보다는 초조감이 더해갈 것 같고, 그것이 무리수로 연결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노무현 정권 출범 첫해인 2003년 말 필자는 한 일간지에 '불임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쓴 바 있다. 2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제목에 '여전히'라는 수식어를 붙여 글을 써야 하는 한국의 현실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