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6일자 오피니언면 '중앙시평'란에 이관열 강원대 교수(언론학 전공)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그가 사람인가, 아니면 신인가. 호모사피엔스에서 진화한 인류라는 종에 속하는, 육신을 가진 사람 맞는가. 어떻게 3세기 이상 지배한 백인들을 용서할 수 있는가. 도저히 범인으로는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을 한 사람이 있다. 누구인가. 넬슨 만델라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350년 동안 흑인은 노동력이나 공급하고, 혜택은 백인이 대대로 누렸던 나라다. 흑백 분리, 차별, 대학살, 가난, 기득권, 양극화…. 이에 만델라는 총을 들었다. 게릴라 항전에 몸을 던졌다. 아프리카가 원래 누구의 땅인데. 그의 분노는 당연하고 정당했다. 그러나 그는 투옥되었다. 외딴섬에 27년이나.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 했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 건가. 그런데 만델라는 감옥에서 나와 대통령이 되자 지배자 백인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도 넘어서지 못한 인종, 지배와 피지배, 기득권의 벽을 넘어 인간이 한 번도 실현해 보지 못한 공존의 정치를 실현했다. 그가 백인에게 칼을 들이대고 총을 겨누었다면 킬링필드가 됐을 나라를 모든 인종이 조화롭게 사는 나라로 만들었다. 그래서 누구는 그를 메시아라 했고, 누구는 성인이라 했다. 그가 받은 노벨평화상은 그가 인류에게 한 위대한 업적에 비하면 오히려 왜소할 뿐이다. 

    고대의 역사(力士) 삼손의 힘은 긴 머리에서 나왔다. 클레오파트라의 힘은 그녀의 높은 코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러나 만델라는 소수민족 줄루족 추장의 아들에 불과했다. 수십 년 장기 옥고에 심신마저 지친 노인이 인류의 미래에 희망의 빛줄기를 비춰준 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는가. 온 인류가 감동하고, 만인이 그에게 머리 숙이는 힘은 어디에서 왔는가.

    상식과 도덕성, 바로 그것이었다. 만델라는 지도자의 판단과 결정이 국민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피의 내전으로 가느냐, 아니면 평화의 나라가 되느냐의 기로에서 그의 선택은 용서와 화해였다. 복수의 정치, 분열의 정치는 꿈에도 없었다. 반면 자신에게는 엄격했다. 스캔들에 휩싸인 부인도 무정하지만 버렸다. 부정부패에 무릎을 꿇은 측근도 과감하게 정리했다. 그가 감방 동지들에게 베푼 유일한 배려는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국민 모두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다. 대화합의 정치를 폈다. 정치가 안정됐다. 그래서 남아공은 아프리카 경제의 반 이상을 생산하는, 아프리카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가 됐다. 지도자의 생각과 선택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이달에 만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만델라가 만든 '진실화해위원회'에 과거사 정리를 끼워넣은 것이다. 위원장에 임명된 송기인 신부의 역사관은 대한민국이 기득권자들, 많이 배운 사람들이 지배해온 나라로 보는 노 대통령의 역사관과 같다. 위원회에 자기 사람들 갖다 넣고, 그래서 출발부터 공정성과 도덕성이 의문시되니 유구무언이다. 어떻게 이 나라에는 "대통령하고 친한 것 세상이 다 아는데 내가 아무리 공정하게 해도 국민이 믿겠나" 하고 고사하는, 최소한의 도덕성을 가진 사람 한 분 없는 것인가.

    이에 비해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은? 198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투투 대주교다. 그는 백인의 지배와 싸웠지만 동시에 흑인의 지배도 반대했다.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원회는 화해에 초점이 있지만 우리 것은 과거정리에 초점이 있는 것 아닌가 여겨진다. 그렇게 되면 일은 쉽지 않다. 자칫 화해는 멀리하고, 정리에만 몰두하게 되면 분열과 대립만 가까워질 뿐이다. 여론조사도 그렇지만 국민이 원하지 않는 과거로의 타임머신 여행은 정말 신중해야 한다.

    남아공은 우리와 꽤 인연이 있는 나라다.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다. 2000년 뉴욕에서 초연된 만델라의 생애를 다룬 오페라 지휘자가 대한민국 여성이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더없이 귀중한 인연은 현 주한 남아공 슈만 대사가 진실화해위원회의 위원이었다는 것이다. 기왕 남아공으로부터 진실화해위원회의 이름을 빌렸으니 우리 과거사정리위원들이 역사에 함부로 손대기 전에 남아공에 가서 만델라를 한번 만나보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그것도 꼭 노 대통령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