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학법 개정안 통과로 국회 모든 일정을 보이콧한 한나라당은 12일 박근혜 대표가 '전투복'이라 불리는 바지정장을 입고 20여명의 소속 의원들이 오전부터 국회 의장실을 점거하는 등 본격적인 '대여투쟁'에 돌입했다.

    이 같은 당의 투쟁방침을 소속 의원들에게 재확인시켜주기 위해 이날 오후 열린 의원총회는 향후 투쟁 계획과 방침 등을 마련하기 위해 소집됐다. 사학법 개정안의 본회의 통과과정에서 너무 무기력했다는 당안팎의 비판을 받고 있는 한나라당으로선 이날 의총을 통해 제1 야당으로서 위상을 되살려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때문에 이날 박 대표의 '전투복 차림'과 의원들의 의장실 점거 등의 모습은 '드디어 한나라당이 무언가를 하려 하는구나'는 기대를 갖게 했고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기대는 잠시뿐. 이날 오후 2시30분에 소집된 의원총회엔 소속 의원 127명 중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치는 50명이 참석했고, 늘 그래왔듯 회의도 약속 시간보다 20분 가량이 지난 뒤 시작했다. 일찍 도착해 회의를 기다리고 있던 의원들의 모습에서도 비장한 각오 같은 건 느낄 수도, 엿볼 수도 없었다.

    이날 의총장에선 중앙일보가 당 소속 김영숙 의원의 교육부 답변자료를 통해 1면 톱으로 보도한 '교육부 고문변호사 사학법 위헌 가능성'이란 제목의 기사가 프린트돼 소속 의원들에게 배포했다. 사학법 개정안의 통과로 인한 후속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모인 의원들에겐 당연히 김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대한 관심과, 여당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가 분출됐어야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프린트된 기사는 소속 의원들에겐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삼삼오오 모여앉은 의원들은 안부인사를 나누는 등 개별 의원들간 담소를 나누기에 바빴다. 또 의총장 중간에 붙인 '사학법 날치기 처리한 김원기 의장 사퇴하라'라는 플래카드도 의총 소집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붙여지는  등 이날 오후 한나라당이 보여준 모습은 '과연 자신들이 직접 장담한 것처럼 장외까지 나가 투쟁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취재진의 눈엔 오히려 '이번 주 날씨가 매우 추워' 장외투쟁은 지금 한나라당 의원들에겐 무리가 있겠구나'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회의 시간을 넘겨 플래카드를 붙이고 있는 당직자들의 모습을 본 한 중진 의원은 "회의시간이 2시30분이라면서 그 전에 붙였어야지… 언제 만들어 놓은 건데 그걸 이제 붙이나..."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 초선의원은 플래카드를 붙이던 당직자에게 "왼쪽이 너무 위로 올라갔어" "삐뚤어졌잖아"라며 균형을 맞춰 붙이라고 요구했고 이를 지켜본 한 재선 의원은 "너무 좌경화 했어. 우경화 해야돼"라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그리고 시작된 의원총회. 첫 번째로 마이크를 잡은 강재섭 원내대표의 첫 마디는 "그 날(9일 사학법 개정안이 처리되던 날) 본회의장에서 고함을 질러 목이 가 목소리가 잘 안 나온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회의를 진행했다. 원내수장인 강 원내대표의 축쳐진 목소리 역시 춥고 나른한 오후 회의에 참석한 의원들의 전의를 불태우기엔 역부족인 듯 했다. 이후 마이크를 넘겨받은 박 대표 역시 입고 온 전투복만큼 전투적인 느낌을 전달하지 못했다.

    이후 비공개로 진행된 의원총회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사학법 개정안 처리의 원천무효'를 위해 얼마만큼 강한 의지를 갖고 회의에 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옛 속담처럼 한나라당이 수십명의 취재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한 공개회의에서 보여준 무기력함이 비공개로 회의를 진행했다고 해서 달라질 리는 만무하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야당이 집권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적의 칼끝에 자기 심장을 드러내는 것만큼 결연한 각오와 자세가 있어야 한다"며 "이런 각오와 자세가 안돼있는 사람들에 의해선 권력교체는 이뤄질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바닥을 친 뒤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지율을 반등시키기 위해 이미 사학법 개정안 처리를 시작으로 한나라당의 심장에 날카로운 칼끝을 들이댔다. 그러나 과연 지금 한나라당의 모습이 적의 칼끝에 자기 심장을 드러내는 것만큼 결연한 각오와 자세가 돼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