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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조
15호 사람들은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곤 한다. 그들이 유일하게 빼앗기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하늘 아래로 어딘가에 소꿉시절 장난들이 있었다. 푸르름에 갖다 대던 희망도 있었다. 구름이 있으면 있는 대로 소박했던 일상들은 작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추억으로 자라고 그리움으로 불어났다. 천둥이 쳐도 서슴없던 청춘은 또 얼마나 박력이 있었던가. 어쩌면 한생은 젊음의 여운일지도 모른다. 그 뒤로 얻고, 이루고, 가꾸어지는 것들은 젊음이 너무 짧아 놓고 온 것들에 대한 보상이자 그림자일 수도 있다.
생의 끝에 다가간 사람일수록 삶을 삶이라 하지 않는다. 날짜라고 한다. 시간이라고 한다. 15호 사람들에겐 그것보다 더 촉박한 개념의 삶이었다. 날마다 태어나듯 깨고, 날마다 죽듯이 잠들었던 그들이기에 '삶'이란 곧 '살고 싶다'였다. 남처럼, 또는 무엇처럼 살고 싶다는 소원이나 희망이 아니었다.
생사의 한 겹 속에서 순간마다 자기 죽음과 비교하며 현재를 붙들고 그저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을 우러르는 감정도 남달라 늘 이렇게 감동했다.
"다 잃었을 때도 하늘을 보라. 단 하나일 뿐인데도 삶이란 얼마나 가득히 주는 것인가."
성진이 하늘을 새삼스럽게 올려다본 건 옹헤야를 잃은 뒤였다. 그날부터 그는 더는 그 푸르름을 17세 아이처럼 바라보지 않았다. 어른처럼 지나간 것은 인정하고, 잃지 않기 위한 다짐으로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세운다는 건 어떤 날엔 위험한 일이었다. 혹은 이유 없는 반항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9분조 어른들과 똑같았다. 한마디로 쳐다볼 수 있는 삶이었다. 더구나 옹헤야가 굽어볼 수 있다고 믿는 하늘이었다. 그때면 성근이 말한 천국의 믿음 속에서 기도처럼 머리를 쳐들었다.
옹헤야가 남긴 병 속엔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조언들이 적혀 있었다. 그것들은 땅 위에서 버티는 방법들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도성진의 가슴엔 아버지 사진까지 품었다. 아침에 인사하고 잘 때도 함께 눕는 아버지 사진! 옹혜야가 주고 간 새로운 심장인 셈이었다. 이젠 누구보다 당당하고 꼿꼿이 허리를 세울 수 있었다.
옹헤야의 첫 생존법은 최종배 길들이기였다.
"첫 번째, 담당 보위원과 갈등을 만들지 말라. 있다면 네가 먼저 찾아가 풀어라. 그놈들은 절대 널 찾아오지 않는다. 깊어질수록 아프게 돌아온다."
옹헤야의 그 조언은 살아 있을 때도 했던 말이었다. 그래서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았다. 어제 작업할 때 상미가 몰래 알려준 비상책도 있었다.
성진은 오전 작업 시간에 최종배를 계속 살펴봤다. 지금은 미꾸라지가 그에게 붙어 있었다. 그는 보위원보다 얼굴 근육에 힘이 더 들어간 표정이었다.
"선생님! 방금 조직부장 선생님 담화 마치고 왔습니다! 제게 8개월 감형해준답니다."
최종배는 흘끗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감형? 여기에 형기가 어디 있어?"
"잡종 탈주범 신고 공로가 막대하다며 특별조치 해주신답니다."
미꾸라지는 한 수 더 뜨며 말을 보탰다.
"그리고... 헤어질 땐 잘 가라고, 이렇게…"
그는 마치 조직부장이 자신에게 흔들어준 모양을 흉내 내며 손을 들고 흔들었다. 최종배는 피식 웃었다. 손에는 이미 막대기를 끌어 쥐고 있었다.
"저… 선생님. 혹시 감형 8개월이면, 제가 받은 형량에서 정확히 몇 년 남았는지 여쭤봐도…?"
최종배는 막대기의 손을 풀었다. 놈이 갑자기 불쌍해졌다.
"너, 탈주범조였잖아."
"…네. 하지만 조직부장 선생님께서 그건 공로와 별개로…."
"15호 탈주범 규칙 몰라?"
조직부장을 들먹이는 미꾸라지 얼굴 한쪽이 멍들어 있었다. 그걸 보는 최종배 눈에는 지겨움과 혐오가 섞여 있었다.
"몇 년 같은 소리 하고 있어. 평생에서 8개월!"
최종배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냥 담배를 챙겨 들고 무심히 자리를 떴다. 미꾸라지의 접혔던 허리가 펴졌다. 산비탈 위로 퍼지는 햇살이 갑자기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사라진 뒤에도 미꾸라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웃을 준비가 된 얼굴인데도 울고 싶어졌다. 최종배 얼굴 살을 물어뜯듯 중얼거렸다.
"평생에서…? 저 쌍놈의 새끼. 내 수명이 몇 년인지나 알고."
미꾸라지의 기분과 상관없이 그날따라 하늘은 무심하게도 푸르고 맑았다. 그도 한숨 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하나 없는 데다 모서리마저 없었다. 자연의 그 뻔뻔함이 더 화가 났고 슬펐다.
"빨리들 하지 못해? 저거 그냥 서 있는 놈 누구야?"
대중없이 던진 그 소리에 작업장은 분주해졌다. 그날은 나무들을 정리해서 한쪽에 쌓는 작업이었다. 산비탈 아래에는 잘려 내려온 나무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가지들은 줄기가 아직 잘린 줄 모르고 새파랗게 휘어 있었다. 그 통나무들을 쪼개는 메아리며 사방에서 톱질하는 소리가 땅을 긁었다.
도련님과 주둥이는 무겁고 긴 통나무를 함께 메고 이동하고 있었다. 뒤에 선 주둥이는 비틀거렸다. 가뜩이나 남에게 끌려가는 뒷자리인데 앞에 선 도련님의 시선은 제멋대로였다. 헐떡이며 따라 걷던 주둥이가 짜증을 냈다.
"야. 너 정말 똑바로 안 걸을래?"
도련님은 걸음을 멈추고 가족세대 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여자들이 칼과 도끼로 나뭇가지들을 자르며 묶고 있었다.
"형도 아까 봤잖아."
"그럼 더 가까이 가던가."
"작업장 이탈하면 맞아요. 오늘은 이게 최선이지."
말은 그랬어도 그의 눈은 미련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주둥이가 비틀비틀하면서도 목소리를 세웠다.
"내가 부탁한 영어 생각해봤어?"
주둥이가 바라던 단 한 문장은 "나는 자유 투사다" 였다. 북한에서는 그 이상의 말이 없었다. 투사는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감정의 언어였다. 혁명투쟁을 강요받는 땅에서 투사가 아니면,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주둥이는 자신의 존재를 투사로 멋지게, 그것도 영어로 포장하고 싶었다.
"왜 하필 또 그거야?"
"이 안에 다 투사잖아. 게걸 투사. 쌍욕 투사. 설사 투사. 매집 투사. 또 뭐가 있지?"
"그냥 조선말 주둥이라니까."
"이러면 해순이한테 말한다? 너 첫날에 바지도 안 입고 갔다고."
"해. 해. 소문내도 상관없어."
두 사람의 가벼운 농담이 방금 지나간 그 밑에선 김성근과 가수가 서로 마주 앉아 톱질하고 있었다. 김성근은 손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소련에서 배운 가수라면 찬송가도 불러 봤슴둥?"
가수는 고개를 저었다.
"나, 이제 가수 아뇨."
김성근은 눈치 없이 다시 물었다.
"… 찬송가 부탁할까 봐서 그럼둥?"
가수의 표정은 딱딱한 널빤지 같았다.
"성악 한다는 놈이… 친구 죽는 처형장에서 노래나 부르고..."
그의 얼굴에 핏기가 돌자 눈물이 그렁해졌다.
"돌 맞는 건 전데… 오히려 날 위로하듯… 그 자식 눈을…"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걸어오던 검은손이 지나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성근에게 물었다.
"쟤는 왜 저래?"
"난 남 얘기 안 하겠수꾸마. 말 안 하려고 하꾸마."
검은손은 더 말을 않고 가수에게로 걸어갔다. 그때 "작업휴식!" 소리가 들렸다. 도성진은 도끼를 내려놓고 최종배를 향해 일어섰다. 휴식으로 숨이 느려지면 결심도 멀어질 것 같았다. 놈은 통나무 위에 걸터앉아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두근거렸다. 다행인 건, 노려보지 않고 멍청해 있었다.
안 그래도 최종배는 요즘 속이 뒤숭숭했다. 당조직지도부 검열 뒤에는 반드시 본부 검열이 따라붙는다. 며칠 전 가족세대 담당 홍신영이 굳이 찾아와 던진 한마디가 마음속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김상미 면담했어요. 미쳤어요? 왜 그러고 살아요?"
정확히는 경고였다. 홍신영은 본부의 검열실적으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최종배가 15호에서 가장 끊고 싶은 명줄이 있다면 바로 그녀였다. 수용자에게 쏟아내는 욕은 업무라지만 같은 보위원인 그에게 품은 증오는 감정이었다. 그 행동으로 나무 위를 기어가는 벌레 하나를 군화로 짓뭉개는데 바로 옆에 다른 발이 보였다. 그 발의 임자는 도성진이었다.
"뭐야?"
성진은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할지 잠깐 고민 중이었다. 최종배의 착잡한 얼굴 위에서 옹헤야의 두 번째 문구를 읽었다.
"보위원은 죄를 두려워하지 않아. 대신, 죄를 들킨 순간을 두려워해. 그 순간을 지우려고 할 때, 너도 같이 지워주는 손이 돼. 그래야 널 기억해."
그 문장을 곱씹는데 최종배가 버럭 소리 질렀다.
"왜 왔냐고 이 새끼야."
성진은 빠르게 말했다. 말하는 중간에 주먹이 날아들까봐서였다.
"상미가 제 친구입니다. 그날 소리치며 뛰어갔는데, 홍신영 여자 보위원이 봤답니다. 그날 있었던 일을 내일까지 자세히 적으라고 했답니다."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와서까지 이게..."
최종배는 무심한 척 쏘아붙였어도 실은 뒷말을 기다리는 귀가 더 열려 있었다.
"어떻게 써서 바쳐야 할지 물어봐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는 최종배 옆으로 손을 뻗었다. 라이터를 들어 올려 보여주었다.
"너 라이터 훔쳐서 조사받았잖아."
성진은 길고 분명하게 마지막 말을 했다.
"그렇게 쓴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라이터 제가 증인입니다."
최종배는 말을 잃었다. 기분이 묘했다. 앞은 수치로 뜨겁고 등은 홍신영을 떠올리는 통쾌함으로 시원했다. 몸의 앞과 뒤가 서로 다른 계절처럼 갈라졌다. 이렇게까지 극명하게 느껴지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최종배는 콩콩 뛰어가는 도성진을 보며 히죽 웃었다. 홍신영의 속을 꿰뚫고 왔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모르고 온 것치곤 꽤 신통했다. 자기가 눈여겨봐야 할 몇 놈 중 하나에 추가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한결 편해지니 눕고 싶었다.※ 다음 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