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 구상' 해석 두고 자주·동맹파 충돌 격화'자주파' 정세현·정동영, 동맹파 직격하며 공세친명계까지 가세… 反美 강경론 힘받는 여권노무현 때 자주파 득세, 동맹 파열의 전철 경고
  • ▲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오는 30일 부산에서 열리는 한일 정상회담 관련 브리핑을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뉴시스
    ▲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오는 30일 부산에서 열리는 한일 정상회담 관련 브리핑을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뉴시스
    이재명 정부가 안으로는 '자주파'와 '동맹파'의 노선 충돌, 밖으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투자 압박이라는 이중 난제에 직면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과 이종석 국가정보원장을 축으로 한 '우(右)동맹·좌(左)자주' 구도가 이재명 대통령의 'E.N.D(교류·정상화·비핵화) 이니셔티브'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갈등을 노출했고, 더불어민주당 내 친명계도 대미 공세에 가세하면서 대미 협상 부담이 커지고 있다.

    자주파 "동맹파가 있으면 되는 일이 없다"

    갈등에 불을 붙인 것은 '자주파 6인회'(임동원·정세현·문정인·이종석·서훈·박지원 등 좌파 정부 시절의 외교안보 핵심 인사들) 멤버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었다. 더불어민주당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정 전 장관은 지난 26일 세미나에서 북한의 일방적인 위반으로 인해 실패한 남북 합의의 대표적인 사례인 '9·19 남북 군사합의'의 복원이 '동맹파 참모들' 때문에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이들의 교체를 요구했다.

    정 전 장관은 "지금 정부에 이른바 동맹파들이 너무 많다"며 "제가 듣자 하니까 (대통령실과 정부) 안에서 '이거 미국이 좀 싫어할 텐데요, 미국이 싫어한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대통령 주변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 주변에 소위 자주파가 있으면 앞으로 나간다. 동맹파가 지근거리에 있으면은 아무것도 못하는데 지금 그렇게 돼 가고 있다"면서 위 실장과 조현 외교부 장관으로 대표되는 '직업 외교관' 출신 동맹파를 겨냥한 듯 "직업 외교관들이 대통령 지근거리에 있으면 되는 일이 없다. 이거 시정해달라"고 촉구했다.

    정 전 장관은 "문재인 전 대통령은 4·27 판문점 선언, 9·19 평양공동선언과 군사분야 합의 등 좋은 것을 다 만들어 놓고도 한미 워킹그룹에 발 묶여서 아무것도 못 했다"며 "이렇게 되면 '문재인 정부 시즌2'가 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안규백 국방부 장관을 겨냥해 "문민 장관을 보내 군인 장악하라 했더니 끌려다니고 있다"며 "군사분야 합의서 하나 해제도 못하고 이렇게 되면 이 대통령은 바보 된다"고 비판했다.

    자주파로 분류되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도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외교부·국방부 출신의 국가안보실 차장들을 배제할 것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보탰다. 정 장관은 24일 비공개 고위당정협의회에서 위 실장 외에 외교부·국방부 출신의 안보실 차장들까지 NSC에 들어오는 상황을 문제 삼으며 NSC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END 구상 순서·'두 국가론' 수용 논란 가열

    더 들여다보면 결국 이번 갈등의 뿌리는 자주파와 동맹파의 근본적인 대미·대북 기조 차이다. 이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각)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제시한 'END 이니셔티브'가 교류·관계 정상화를 앞세운 뒤 단계적 비핵화로 이어진다는 해석이 나오면서, 북한의 사실상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고 김정은이 주장한 '두 국가론'을 수용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논란이 확산되자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뉴욕 현지 기자간담회에서 "교류·관계 정상화·비핵화는 서로 추동하는 구조"라며 "우선순위나 선후관계가 없다"고 진화에 나섰다. 그는 "정부는 두 국가론을 지지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남북 관계는 통일 때까지 '잠정적 특수 관계'라는 원칙을 견지한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같은 날인 24일(한국시간) '북한의 2국가론과 남북기본협정 추진 방향' 주제 세미나에서 "남과 북은 유엔에 동시 가입했고, 국제법적으로 국제사회에서 국제 정치적으로 두 국가였고 지금도 두 국가"라며 "(김정은이 주장하는) 적대적 두 국가론을 평화적 두 국가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다음 날 기자간담회에서는 "세 가지 중 순서(교류·관계정상화·비핵화)가 있냐는 질문이 있는데, 맨 먼저 시작해야 할 것이 대화와 교류"라며 '교류 선행론'을 펼쳤다.

    26일에는 정세현 전 장관이 가세해 더욱 직접적인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김정은이 21일에 비핵화를 얘기하면서 북미 정상회담에 안 나겠다고 얘기했으면 유엔총회 연설문을 사전에 만들었을지라도 즉석에서 그걸 고쳐 '비핵화' 문구를 빼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위 실장은 27일 언론 인터뷰에서 "이 제안(END 구상)은 통일부에서 나왔다"고 밝혔다. 또 "(END에) 선후 관계나 우선순위는 없다"며 "두 국가론을 지지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고 재차 선을 그었다.

    ◆친명계, '미국산 보이콧' 경고하며 자주파에 가세

    논란은 곧장 여권을 넘어 당내 친명계로 번졌다. 친명계 모임인 더민주혁신회의는 트럼프 행정부를 겨냥한 강경 메시지를 연이어 내며 자주파의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이들은 23일 기자회견을 열고 "만일 미국이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국민적 행동에 돌입할 것이다. 미국 여행 보이콧을 비롯해 미국 생산 제품뿐 아니라 주식 불매 등 전 사회적인 거부 운동으로 맞설 것이다"라고 트럼프 행정부를 향해 경고했다.

    또 27일 논평을 내고 트럼프 행정부를 향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도 정도가 있다"며 "미국이 안보 동맹국이자 경제 동맹국인 한국을 마치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착각하는 듯하다"고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이어 "우리 정부는 트럼프 정부의 부당한 요구를 절대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기류 속에서 위 실장은 자신을 두고 미국에 우호적이라는 자주파의 주장에 대해 직접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29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제가 무슨 파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협상 과정에서 저 사람이 어떤 태도를 취할까, 무슨 파라고 하는데, 제가 이 안에서는 가장 강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저는 협상의 레버리지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미국과의 협상은 상당히 첨예한 상황에서 진행이 되기 때문에 가용 가능한 카드들을 이용해야 하지만, 항상 '오버 플레이'(과한 행동)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위 실장이 우려한 대로, 한미 협상 환경은 점점 악화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의 3500억 달러 투자를 "선불"(up front) 방식으로 요구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한국 정부는 현금 일시 납부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직접 투자 비중, 투자처 결정권, 수익 배분권 등을 두고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전 타결 필요성이 제기되지만, 투자 방식과 이행 구조를 둘러싼 이견이 커 협상 장기화 우려도 커지고 있다.

    ◆盧 정부, 결국 자주파 득세해 한미동맹 균열

    전직 고위 당국자는 뉴데일리에 "내부 노선이 갈라진 상태에서는 대미 협상에서 일관된 메시지를 내기 어렵다"며 "동맹 관리가 흔들리면 결국 한국이 쓸 수 있는 카드 자체가 줄어들고,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에도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자주파가 주도권을 쥐었을 때 동맹이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았던 경험을 되새겨야 한다"며 "자주파의 단기적 목소리가 대미 독자성을 확보해 국익을 증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전략적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