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의사불벌죄·낮은 구속률…법망 피해가는 가해자들피해자 보호 '의사 존중'에만 의존 … 제도적 허점 여전경찰, 접근금지 전수점검·강력 분리조치 추진
  • ▲ 30일 오전 11시 45분께 대전 중구 한 지하차도 근처에서 전 연인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A(20대)씨가 도주 약 24시간 만에 긴급체포 됐다. 사진은 A씨가 도주에 이용한 렌터카 주변으로 폴리스라인이 처져 있는 모습. 2025.7.30. ⓒ연합뉴스
    ▲ 30일 오전 11시 45분께 대전 중구 한 지하차도 근처에서 전 연인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A(20대)씨가 도주 약 24시간 만에 긴급체포 됐다. 사진은 A씨가 도주에 이용한 렌터카 주변으로 폴리스라인이 처져 있는 모습. 2025.7.30. ⓒ연합뉴스
    전국에서 연이어 발생한 교제폭력 살인·살인미수 사건이 사회적 충격을 낳고 있다. 경찰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살인·살인미수 여성 피해자 3명 중 1명꼴로 이전에 폭력 피해 이력이 확인됐지만 이를 차단할 실질적 장치는 여전히 미비하다. 반의사불벌죄와 낮은 구속률, 보호 체계의 허점 등이 피해자들을 다시 범죄 현장으로 내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9일 대전 서구 괴정동의 한 빌라 골목길에서 20대 남성 A씨가 전 연인이던 30대 여성을 흉기에 찔러 살해했다. 그는 범행 직후 현장에서 흉기와 휴대전화를 버리고 인근에 주차했던 공유차량을 타고 도주했다. 이후에는 오토바이, 렌터카를 번갈아 타며 이틀간 도주했다. 경찰은 폐쇄회로(CC)TV를 통해 이동 경로를 분석했지만 도중에 행적이 끊기면서 수사에 난항을 겪기도 했다. 경찰은 A씨가 전 연인의 장례식장을 찾았다는 신고로 재차 추적에 나섰고 결국 30일 오전 11시 45분께 대전 중구 산성동의 한 도로에서 A씨를 긴급체포했다.

    피해자는 사건 전 수차례나 112에 신고했다. 경찰은 A씨가 피해자에게 폭력을 행사한 뒤 경찰관을 향해서도 폭력을 휘둘러 업무상 공무 방해 등 혐의로 입건했다. 경찰은 피해자에게 스마트워치 지급과 보호조치 등을 제안했으나 피해자는 거부했고 처벌불원서를 제출하며 수사도 흐지부지됐다. 경찰관이 범죄 예방 모니터링 차원에서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별도의 회신을 받지 못 한 것으로도 전해졌다.

    서울 구로구에서는 31일 60대 중국인 남성 B씨가 동거녀를 살해했다. 피해자는 사건 닷새 전에도 경찰에 신고했지만 "다툼이 해결됐다"는 연락에 사건은 종결됐다. B씨는 2023년에도 가해자에게 폭행 신고가 접수돼 벌금형이 선고된 이력이 있었다.

    울산에서는 지난 28일 병원 주차장에서 30대 남성 C씨가 전 여자친구를 흉기로 찔러 중태에 빠뜨렸다. C씨는 범행 당일 수시간 동안 피해자를 기다리다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시민들이 제압해 현장에서 체포했지만 사전 계획 가능성이 높게 보고 수사가 진행 중이다.

    11일 경찰청이 발간한 '2024 사회적 약자 보호 주요 경찰 활동'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살인·살인미수 여성 피해자 333명 중 108명(32.4%)이 과거 폭력 피해 이력을 갖고 있었다. 교제폭력 피해 이력은 31.5%에 달한다.
  • ▲ 경찰, ⓒ뉴데일리 DB
    ▲ 경찰, ⓒ뉴데일리 DB
    ◆신고·검거는 늘어도 구속률은 '2%대' 머물러

    교제폭력은 급증하는 추세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교제폭력 신고 건수는 약 7만7000건으로 2020년 대비 57% 증가했다. 2024년에는 8만8394건으로 다시 14.6% 늘었다. 같은 기간 검거 인원도 약 8900명에서 1만4700명으로 5.6% 증가했다.

    교제폭력 유형은 폭행·상해(9832명)뿐 아니라 협박·감금(1427명), 성폭력(529명), 기타 범죄(2912명)까지 다양하다. 욕설, 일상적 감시, 금전 통제, 위치 추적, 불법 촬영 등 디지털 스토킹까지 포함된다.

    하지만 구속률은 극히 낮다. 2023년 교제폭력 가해자 1만3939명 중 구속은 310명(2.22%)에 불과했다. 2024년에는 구속이 280명으로 6.6% 더 줄었고 불구속 처리는 1만4420명으로 오히려 늘었다.

    현행법은 교제폭력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거세다. '가정폭력처벌법'은 혼인·혈연 중심으로 규정돼 사실혼 외 연인 관계는 보호 대상에서 빠진다. '스토킹처벌법'의 경우 반복적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일회성 폭력이나 단절 이후의 보복 행위는 사각지대에 놓인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하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도 문제로 지적된다. 교제폭력은 형법 상 폭행죄로 적용되는데 이는 반의사불벌 규정이 있기 때문에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수사가 중단된다. 대전 사건처럼 피해자가 처벌불원서를 제출하면 가해자가 법망을 피해갈 여지가 커진다는 것이다.

    피해자 보호 역시 '피해자 의사'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고를 했더라도 피해자가 두려움이나 혼란 속에 보호를 거부하면 제도는 멈춘다. 

    전문가들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가까운 관계라는 이유로 '연인 간 일'로 치부되거나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풀려나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서초동 한 변호사는 "교제폭력 특성상 피해자는 혼란과 두려움 속에 있어 적극적 보호 요청이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주소, 일상, 가족 관계 등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불안감'이 신고를 망설이게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설명했다. 또한 "피해자가 자신이 속한 학교나 직장에서 가해자와 마주치거나 피해 사실을 알렸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도 있어 피해자들이 신고를 망설이게 되고 실질적인 보호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그는 "교제폭력 특성과 위험성을 명확히 반영할 법적 근거 마련이 시급하다"면서 "교제폭력이 보복 범죄로 이어지는 주요 원인인 '반의사불벌죄' 규정을 폐지하거나 피해자가 처벌 불원 의사를 밝힐 때 피해자 전담 경찰관의 상담을 거쳐 진정한 의사인지 다시 확인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 ▲ 경찰. ⓒ뉴데일리 DB
    ▲ 경찰. ⓒ뉴데일리 DB
    ◆경찰 "스토킹 접근금지 조치 대상자 전수점검 실시"

    경찰은 이날 스토킹·교제폭력 등 관계성 범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31일 "경찰에 여러 차례 신고하였거나, 접근금지 기간 중이었음에도 소중한 생명을 지키지 못한 점을 뼈아픈 통찰의 계기로 삼아 고위험 관계성 범죄 대응에 경찰의 역량을 보다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최근의 사건들이 주로 접근금지 조치를 위반한 상태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스토킹처벌법' 상 접근금지가 진행 중인 사건 전부에 대한 위험성을 재확인할 예정이다.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이나 유치장 유치 등 강력한 분리 조치를 추가하겠다는 방침이다.

    연인 관계에서의 사건에 대해서는 강력사건으로 이어질 우려가 높다고 보고 민간경호 등 범죄피해자 안전조치도 적극적으로 실시할 계획이다.

    또한 7~8명의 팀 단위 순찰을 비롯해 흉기 소지 여부 등을 확인하기 위한 불심검문, 순찰차 거점 배치 등 수단으로 재범 심리를 차단하겠다고도 밝혔다.

    유 직무대행은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더라도 위험성이 높다고 보고 가해자 격리 등 적극적인 수사를 진행하는 수사관들이 오히려 민원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러면서 "적극행정 면책 제도 등을 활용하겠다"면서 "수사관들이 판단한 위험성에 따라 적극적으로 사건을 처리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경찰은 사례 분석 등을 통해 '관계성범죄 종합 대책'도 마련할 예정이다. 교제폭력은 법적 근거가 없어 접근금지 등 조치를 할 수 없고 가정폭력·스토킹은 법상 임시·잠정조치 또한 경찰-검사-법원 단계를 거쳐 결정되는 과정에서 피해자 보호가 지연되고 있다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 사회적 논의를 거쳐 입법적 보완을 추진해 나간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