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보길 뉴데일리회장, 60년째 기자 '대기록'조선일보 '克日' '환경' '정보화' 등 캠페인 주역 1995년 '조선닷컴' 창간 ‥ '온라인미디어' 개척2009년 '자유민주주의 社是'로 뉴데일리 대도약"이승만 건국정신, 반공, 반외세 독립정신 계승" "헌법체제·한미동맹 지켜야 '북중러 노예' 안돼"
  • ▲ 인보길 뉴데일리미디어그룹 회장. ⓒ정상윤 기자
    ▲ 인보길 뉴데일리미디어그룹 회장. ⓒ정상윤 기자
    기자(記者)는 말 그대로 기록하는 사람이다. 정치·사회·경제·문화 각 분야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언론 매체를 통해 세상에 알리는 이들이다. 과거로 치면 왕과 대신들을 중심으로 조정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하던 사관(史官)과도 같은 존재다.

    기자들이 모인 언론사는 사건에 집중하는 '워커홀릭'만이 살아남는 세계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잦은 술자리와 스트레스·과로 등으로 각종 질병을 달고 산다. 1963년부터 2010년까지 48년간 언론에 보도된 3200개의 부음기사와 통계청 사망 통계자료를 분석한 결과 수명이 가장 짧은 직업군으로 언론인이 꼽혔다(김종인 원광대학교 복지보건학부 교수팀). 이 자료에서 언론인의 평균 수명은 67세 수준이었으며, 평균 82세인 종교인과 15년 차를 보였다.

    직장생활 30년도 쉽지 않은데 올해 2월 10일 자로 '현업 기자 60년'을 맞는 대기자가 있다. 적어도 대한민국 언론사 최초의 기록으로 보인다.    

    60년째 기사를 쓰고 있는 인보길(印輔吉) 뉴데일리미디어그룹 회장을 만났다.

    ◆30년은 '오프라인', 30년은 '온라인'


    1965년 2월 10일 기자로 '데뷔'한 인 회장은 조선일보를 거쳐 뉴데일리에 이르기까지 60년 동안 신문을 만들어 왔다. 30년간은 오프라인(Offline) 매체에서, 나머지 30년은 온라인(Online) 매체에서 기사를 쓰고 편집하고 칼럼을 써온 '기자 인보길'을 감히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시대를 선도하는 '프런티어 언론인'이라 할 수 있다.

    고(故) 방우영 조선일보 회장, 고(故) 선우휘 주필, 고(故) 최병렬 편집국장, 안병훈 조선일보 부사장(현 기파랑 대표) 등과 손을 맞잡고 조선일보 전성시대를 이끈 주역 중 한 분이다. 1995년 인보길 디지틀조선일보 대표가 이진광·이성복 기자 등과 함께 창간한 '조선닷컴(chosun.com)'은 오프라인 중심에서 온라인 중심으로 미디어 시장을 탈바꿈시킨 '미디어의  대혁명'이었다.

    '편집의 귀재'로 경쟁 신문사에 물을 먹이는 촌철살인(寸鐵殺人) 제목과 '여소야대'등 시대의 키워드를 쏟아내 이름을 날린 인보길 기자는 편집국장을 두 차례 역임한다. "일본을 이기자-극일(克日)" "영어를 배우자. 국제인이 되자" "쓰레기를 줄입시다" "배기가스 줄입시다. 자전거를 탑시다" "샛강을 살립시다" 등의 국민적 캠페인을 이끌어 '조선일보는 국민 교육신문'이라는 찬사를 이끌어낸 주역 중의 주역이다.

    1995년 한국 최초의 인터넷신문사 '디지틀조선일보'를 창설한 인보길 기자는 디지털미디어의 경험을 바탕으로 2009년 뉴데일리로 무대를 옮긴다. 디지털미디어로 걸음마를 걷던 다섯 살짜리 뉴데일리는 인보길 사장을 맞아 진정한 뉴미디어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뉴데일리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자유통일을 사시(社是)로 내걸고, 좌편향으로 기운 대한민국 언론계를 바로잡기 위한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유민주주의의 파수꾼 '뉴데일리' 역사의 시작이다.
  • ▲ 뉴데일리 창간 10주년 기념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인보길 회장. ⓒ뉴데일리
    ▲ 뉴데일리 창간 10주년 기념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인보길 회장. ⓒ뉴데일리
    ◆'늙을 시간 없는' 이승만 닮아가

    왜곡된 역사교육의 최대 희생양인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진짜 역사'를 널리 알린 것도 인보길 기자의 빼놓을 수 없는 공적 중 하나다.

    2010년부터 '이승만 포럼'을 운영, '이승만 다시 보기 운동'을 전개한 인보길 기자는 좌파 진영이 퍼뜨린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 이승만의 두 얼굴' 속 허위사실을 지적해 좌편향된 역사계에 경종을 울렸고, '이승만 다시 보기' '이승만 현대사 – 위대한 3년' 등을 집필해 66년을 꿰뚫은 '거인 이승만'의 통찰력과 혁명정신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의 상임고문과, 이승만기념관 건립위원으로서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공훈과 정신을 후손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까지 뉴데일리에 수많은 건국-호국 역사를 비롯, '이승만 건국사'를 장기 연재하며 격동의 시대였던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집대성 중이다.

    60년간 쉼 없이 달려온 이 대기자의 행보를 보노라면 42.195㎞를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주파하는 마라토너가 떠오른다. 마라톤은 초반에 너무 빨리 달리면 에너지를 조기에 소모해 후반에 뒤쳐질 공산이 커진다. 긴 시간을 달릴 수 있는 체력은 기본, 어느 구간에서 속도를 조절하고 언제 스퍼트를 낼 지 등 치밀한 전략도 필요하다. 긴 시간 중 지치고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높은 정신력과 배짱도 갖춰야 한다.

    놀랍게도 인보길 기자는 '60년 기자 생활' 동안 매너리즘이나 슬펌프를 겪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그는 1965년 2월 10일 조선일보에 출근해 수습기자로서 첫 발을 뗀 이래, 60년이 흐른 2025년 2월 10일에도 '변함없이' 뉴데일리에 출근해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기자 인생'의 황금기는 60세부터

    특별한 병치레도 없이 365일 회사에 나와 '신문밥'을 먹어 온 인보길 회장. 그는 날마다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와 정보를 씹어 먹는 재미에, 혹독한 '야근 강행' 때조차 신나고 행복했었다고 회상한다.

    그의 건강을 책임지는 '보약'은 '이승만'이다. 73세에 나라를 세우고 80세에 한미동맹을 이룩한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삶을 되돌아 보면 '나이는 숫자'란 말을 실감하게 된다고.

    인 회장도 이승만 대통령처럼 평생 특별한 운동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도 여느 청년 못지않은 왕성한 체력을 자랑한다. '늙을 틈이 없는' 자유분방한 영혼의 소유자, 이승만을 깊이 연구한 탓일까. 이젠 정신과 철학을 넘어 체력까지 그를 닮아가는 모양새다.

    올해로 만 105세가 된 원로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인생의 황금기는 60세부터 75세까지다. 75세부터 90세까지는 마음껏 달릴 나이다. 75세까지 성장하고 90세까지 달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김 교수의 말대로라면 기자 나이로 '환갑(還甲)'을 맞은 인 회장은 기자 인생의 황금기에 접어든 셈이다. 과거에 머무는 게 아닌, 아직도 앞을 바라보고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할 때라는 것이다. '기자로서' 75세까지 성장하고 90세까지 달려갈 인 회장의 모습이 그려진다.
  • ▲ 인보길 뉴데일리미디어그룹 회장. ⓒ정상윤 기자
    ▲ 인보길 뉴데일리미디어그룹 회장. ⓒ정상윤 기자
    다음은 인보길 회장과의 일문일답.

    Q. 인보길 회장님, '기자 60주년'을 맞으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회장님께서 언론계에 입문하신 지 어느덧 60년이 흘렀습니다. 기자 나이로 치면 이순(耳順)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환갑(還甲)'을 맞으신 건데요. 찾아보니 국내에 유례가 없는 기록인 것 같습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올해가 해방 80년, 대한민국 건국 77주년입니다. 격동의 그 현대사 가운데서 60년이나 기자로서 살아온 세월의 속도에 새삼 스스로 놀랍니다. 헤아려보니 이승만 건국대통령부터 열 세분의 대통령을 겪었고, 신문기자로서 열 한분의 대통령 시대를 지켜봤습니다만, 지금 이게 무슨 꼴입니까? 기자 60년 소감보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당면한 위기감에 몸이 떨립니다.

    지난 세월 별의별 정치 상황을 다 체험했지만, 이런 '내란 사태'는 처음 봅니다.

    국회의 다수결 독재와 탄핵 무기화, 대통령의 어설픈 비상계엄, 사법부와 헌법재판소의 '정치판사'들, 증거도 불분명한 '내란몰이' 난장판에서 얼씨구나 설치는 대통령병자들, 한마디로 국가자살 직전입니다.

    이제 보니 한국에서 반공반중 대통령은 탄핵당해야 하는 것이 정례화한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됐다지만 80년 전과 마찬가지로 분단국의 비운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 탄핵몰이 난동은 좌우투쟁, 이념전쟁, 곧 체제전쟁입니다.

    해방직후나 건국기보다 주변 강대국의 한반도 쟁탈전이 더욱 교활해졌고, 거기에 얽혀든 정치세력들과 심지어 범죄집단까지 꼭두각시처럼 권력 강탈에 나선 이 사태를 뭐라 할까요? 일찍이 이승만 대통령이 걱정하던 '사대주의 식민지'로 회귀하는 역주행, 그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국가 안녕'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승만-박정희 두 대통령이 나라의 기반을 다져놓았기에 이 '광풍'도 '자살극'으로 꺼지리라 믿고 잠을 청합니다. 선진화된 국민 파워가 이제는 '중국의 예속화' 따위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니까요. 자유투쟁의 끈을 놓지 맙시다. 희망의 봄바람도 멀지 않았습니다.
  • ▲ 인보길 뉴데일리미디어그룹 회장. ⓒ정상윤 기자
    ▲ 인보길 뉴데일리미디어그룹 회장. ⓒ정상윤 기자
    "방우영 '언론 혁명', 뉴데일리가 계승해"

    Q. 회장님께서 과거 고(故) 방우영 조선일보 고문과 인터뷰하실 때 "1965년 1월 조선일보에 입사할 당시 언론계가 '방우영 혁명 바람'으로 난리가 났다"며 "'신문 혁명아 방우영'이란 유행어가 돌 정도"라고 하셨는데요. 제가 2009년 뉴데일리로 이직했을 때 회장님께서 "세이브 인터넷(Save Internet)"을 외치시며 "뉴데일리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수호하는 인터넷 전초기지로 삼겠다"고 말씀하셨던 게 눈에 선합니다. 실제로 뉴데일리가 2009년부터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면서 인터넷뉴스 분야는 물론 자유우파진영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킨 매체가 됐다고 자부하는데요. 온몸으로 부딪친 '신문전쟁' 끝에 '1등 신문 조선일보'를 만들어 낸 방 고문의 '신문철학'을 인 회장님께서 계승하셨다고 봐도 무방할까요?

    - 제가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한 것은 1965년 2월 10일, 그때 처음 만난 방우영(당시 37세 상무)이란 인물은 알고보니 '신문계의 혁명아'였지요. 본인은 평생 '신문인' 이외의 호칭을 일체 거부했지만, 그분이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인터뷰한 기사를 쓰면서 '혁명아'란 평가를 붙였다가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조선일보 경영을 맡으면서 우리 동기들을 처음 뽑았고 잇따라 그해 100명 가까운 신세대를 추가 입사시켜 세대교체를 단행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만에 조선일보를 1등 신문으로 환골탈태시켰습니다. 젊은 싱크탱크를 부려서 젊고 참신한 새시대 신문을 만들어 급변하는 독자들의 요구에 제공했으니 대박이 났지요.

    그게 어떤 시대였습니까? '반공' 국시와 '민생고 해결'을 내건 '박정희 쿠데타' 이후 경제성장-수출입국 "일하면서 싸우자"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새마을운동과 중화학 산업혁명으로 돌진하던 '유신 독재' 엄혹한 시절입니다.

    방우영은 타고난 전략가였습니다. 날마다 수십개의 기업들이 탄생하는 '개발 붐' 시대 독자시장을 겨냥해 '경제도 키우고 언론자유도 지키자'는 전략카드를 뽑았지요. 그 사례의 하나로 '신년주제(新年主題) 캠페인'이 있습니다. 해마다 '올해의 국민 테마'를 선정해 독자들의 갈등도 풀어주고 정권의 칼날도 피해가며 전국민의 의식개혁 운동을 벌였던 것입니다. 예컨대 그 주제들은 이렇습니다.

    "갈등은 해소돼야 한다" "국민화합은 이뤄져야 한다" "평행선은 만나야 한다" 등등, 그러면서 동시에 "경제대국은 우리 손으로 이룩하자"며 일년내내 화전양면작전 특집을 펼쳤습니다. 경제면에는 마이홈-마이카 시대, 샐러리맨 탈출기, 수출상품 잘만들기, 글로벌시장 순방 소개 등, 경제성장에 부자되기를 갈구하는 국민들의 구미에 딱딱 맞춰주는 기획들을 쏟아냈답니다. 그러니 눈부시게 들어서는 아파트 단지마다 조선일보만 찾고, 정부도 기업들도 조선일보를 보지 못하면 아침회의를 못 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지요. 명실공히 국론을 이끄는 조선일보 시대가 열렸던 것입니다.

    캠페인 TF팀은 신이 났지요. 편집부장이던 나는 시대변화에 어울리는 '우아한 제목'을 만들기 위해 선우휘 주필과 최병열 편집국장과 함께 머리를 짜내던 기억들이 지금도 심장을 뛰게 합니다.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경제개발 열풍을 두고, 당시 야당의 김영삼-김대중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며 길바닥에 누워 농성할 때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무작정 반대하지 않고 국민도 살고 정부도 살고 언론도 사는 윈윈전략을 구사한 방우영은 박정희와 나란히 대한민국의 국가개조를 이끌었던 한 시대의 '언론 혁명아'로 평가돼야 마땅합니다. 그 계승자가 누구냐고요? 뉴데일리(NEWDAILY)의 새로운 엘리트들이 계승하고 있음에 감사하고 희망에 넘칩니다.
  • ▲ 2023년 12월 뉴데일리미디어그룹 송년회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뉴데일리 직원들. ⓒ뉴데일리
    ▲ 2023년 12월 뉴데일리미디어그룹 송년회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뉴데일리 직원들. ⓒ뉴데일리
    "'쓰는 자가' 기자요, '기자가 써야' 뉴스"

    Q. '평생기자'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 바로 회장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이승만 건국사'를 뉴데일리에 연재하고 계신데요. 60년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후회스럽거나, 슬럼프에 빠진 적은 없으신지요? 그런 난관이 있으셨다면 어떻게 극복하셨는지도 여쭙고 싶습니다.

    -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매너리즘이나 슬럼프를 겪어 본 기억이 없습니다. 선진사회 일본과 미국 매체를 공부하느라 쉴 틈이 없었지요. 뒤늦게 일본어도 영어도 많이 익혔답니다. 날마다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와 정보를 씹어 먹고, 새로운 기획을 짜내는 회의의 연속이었죠. 급증하는 중산층 독자시장을 이끄는 언론기능의 극대화 방안을 강구하고, 다른 선진국 같은 나라와 국민을 키우기 위한 야근 강행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달픈 밤들이 왜 그리 신나고 행복했던지요.

    Q. 우문일지도 모르겠지만 회장님께서 기자가 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기자 초년병 시절 어떤 각오를 가지셨고, 이후 뜻한 바를 이루셨는지 궁금합니다. 나아가 회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기자'란 무엇인지, 언론계 대선배로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쓰는 자'가 기자요, '기자가 써야' 뉴스가 됩니다. 기자란 날마다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고 거기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새 역사의 창조자 아닙니까?

    더구나 온라인 언론시대, 국민 모두가 미디어를 가지고 온갖 기록을 쏟아대는 '1인 미디어' 전성시대, 저마다 일가견을 자처하는 그들에게 기자는 누구입니까? 온라인시대 독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을까요?

    가짜정보 홍수에 침몰한 독자들은 진실을 갈구하며 판단의 스탠다드를 찾고자 합니다. 따라서 기자는 진짜 진실과 상황 판단의 가치기준을 제공하는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가 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 공부와 취재와 고품질 지성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언제부턴가 한국엔 주류언론이 벌써부터 사라지고 있습니다. 한국 근대화를 주도하던 언론 본연의 '정도정론(正道正論)'을 찾기 힘든지 오래 됐지요. 대형 언론사들이 '1인 미디어'로 변한 듯 기회주의, 편가르기, 군중심리 '떼창' 소리만 요란합니다.

    이것은 뉴데일리에 절호의 찬스입니다. 정론지이자 자유의 파수꾼인 뉴데일리가 '얼음 같은 머리와 횃불 같은 가슴'으로 방황하는 대중을 진실과 정론으로서 정의의 길로 인도합시다.

    Q. 회장님의 '기자인생'을 1기와 2기로 나눈다면 60년 전인 1965년 수습 7기로 조선일보에 입사해 2005년 퇴임하신 걸 1기로, 2009년 뉴데일리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해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2기로 볼 수 있겠는데요. 각각의 시기를 '내가 무엇을 어떻게 이룩한 시기였다'고 한 두 문장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까요?

    - 욕심이랄까, 돌아보면 뭔가 이룬 듯 이루지 못한 아쉬운 세월입니다, 앞서 조선일보를 1등으로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면 지금은 우리 뉴데일리를 더욱 발전시키는 데 헌신할 따름입니다.
  • ▲ 2009년 3월 인보길 대표이사가 취임하며 제2의 창간을 선포한 뉴데일리는 2015년 서울 중구 단암타워(3층)로 사옥을 옮기고 남대문 시대를 활짝 열었다. ⓒ이기륭 기자
    ▲ 2009년 3월 인보길 대표이사가 취임하며 제2의 창간을 선포한 뉴데일리는 2015년 서울 중구 단암타워(3층)로 사옥을 옮기고 남대문 시대를 활짝 열었다. ⓒ이기륭 기자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Q. 앞선 질문에 덧붙여 잠시 과거를 되돌아보는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조선일보 재직 당시 가장 역점을 두고 열정적으로 일했던 프로젝트나 기사가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 저는 서울대 신문대학원 1회 졸업생입니다. 조선일보 제작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언론의  4가지 기능 가운데 '의제 설정기능(National Agenda Setting)'을 아시지요? 국가적 이슈, 국민적 숙제, 사회적 난제 등을 찔끔찔끔 건드리지만 말고 하나의 주제로 묶어 제시하고 종합적으로 끊임없이 제시 분석하여 풀어내는 계도기능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신년주제'도 그 하나의 예입니다만, 그것보다 국가적 국민적 이슈를 찾아내 구석구석 심층진단 대안제시에 집중했지요. 한국인의 의식구조 현대화,  과외 문제 등 교육개혁, 노동문제, 의료개혁 등 "뛰고 뛰자. 세계 일류가 되자"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 대안을 찾게 몰아갑니다. "조선일보는 국민 교육신문"이란 명성이 그렇게 정착됐습니다.

    그뿐인가요. 아젠다 세팅 기능은 세팅에 머물지 않고 지속적인 캠페인을 벌어야 결과가 나옵니다. 즉 '아젠다 키핑(Agenda Keeping)'입니다. 마침 그때 불타오르던 "하면 된다"는 국민정신에 불붙여 성공한 사례를 몇가지 소개하지요.

    "일본을 이기자-극일(克日)" 시리즈는 일본 교과서의 한국역사 왜곡을 고발해 시정시키면서 우리 국민들의 고정관념에서 수구적 잔재를 씻어내 '일본 추월'이라는 에너지를 끌어낸 기획입니다.

    "영어를 배우자. 국제인이 되자" 시리즈는 88서울올림픽이 유치되자 '우물한 개구리' 국민의식을 세계적 스탠다드로 끌어올리려는 운동이었습니다. '화장실의 국제화' 캠페인도 함께 벌여 화장실혁명도 일어났습니다. 당시 올림픽 슬로건이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였지요.

    "쓰레기를 줄입시다" 캠페인은 동서고금 어느 환경캠페인보다 대박난 작품입니다. 정부는 물론 전국민이 자발적으로 앞장서서 성공한 케이스죠. 지금은 일반화된 '분리수거'도 그때 시작됐습니다.  

    "배기가스 줄입시다. 자건거를 탑시다"라는 캠페인을 벌이자 서울시가 앞장서 올림픽대로에 23㎞ 자전거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강남북로 합쳐 80㎞가 넘는다지요.

    "샛강을 살립시다"는 전국 상수도 수원의 오염을 원전봉쇄하기 위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국민적 환경캠페인은 급기야 유엔이 인정해 상을 줬고, 영국이 방우영 회장을 런던에 초청해 훈장을 수여하는 등 전 세계가 인정하고 호평한 캠페인이었습니다. 저 역시 이를 계기로 엘리자벳 여왕이 한국을 답방해 잔치를 벌였을 때 여왕의 손을 잡아 봤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에서도 큰 관심을 갖고 벤치마킹한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자 일본 측으로부터 '연대' 제의를 받았지요. 1995년 자매지 일본 최고(最古)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을 찾아가 '한일 국제환경상'을 제정했는데, 어느새 올해로 30회 시상을 하게 됐군요.
  • ▲ 인보길 뉴데일리미디어그룹 회장. ⓒ정상윤 기자
    ▲ 인보길 뉴데일리미디어그룹 회장. ⓒ정상윤 기자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자유통일이 사시"

    Q.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시다가 돌연 1995년 디지틀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며 인터넷신문이라는 신세계의 문을 활짝 여셨는데요. 디지틀조선일보는 네이버가 생기기도 전인 당시 국내에 인터넷신문과 포털이라는 개념을 정립시킨 매체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토양에 뿌리 내린 뉴데일리는 인터넷, 소셜 미디어, 모바일 앱 등 다양한 뉴미디어가 등장한 온라인시대를 선도하는 매체로 성장했습니다. 각 매체의 창간 배경이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 나의 기자 60년은 오프라인(Offline) 30년, 온라인(Online) 30년입니다. 종이신문 조선일보 만들기에서 인터넷신문 디지틀조선일보와 뉴데일리로 갈아탔으니까요. 뉴데일리 인수 후에 온라인 언론의 모토로서 '자유의 파수꾼'이라는 깃발을 들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글로벌 시장경제, 자유통일'이 그것입니다. 뉴데일리의 탄생이유, 사시(社是)이자 편집의 기본노선이며 뉴데일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좌익정권들이 '햇볕정책'이란 이름으로 공산독재와 손을 잡고, 대통령이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될 나라"로 공언하며 제주4.3폭동 반역집단을 명예회복시켰을 때, 뉴데일리가 나섰습니다. 24시간 리얼타임 온라인 매체인 뉴데일리 입장에선 집권 좌파와 대결하는 24시간이 '위기의 순간들'입니다. 이 순간에도 좌파독재의 마수가 언제 덮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뒤에는 늙은 '언론귀신'이 지키고 있으므로 "정의와 진실은 항상 승리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굳게 믿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분발하시기 바랍니다.

    창간 배경에 대한 질문은 사실 이진광 사장이 답해야 할 메뉴입니다. 1995년 해방 50주년 때 국가적 정보화 및 조선일보의 업그레이드를 부르짖은 '정보화 캠페인'의 슬로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를 기억하십니까? 당시 이진광 기자의 작품입니다. 잘나가는 정치부 기자가 갑자기 컴퓨터 전문기자로 변신하더니 '정보 혁명가'로 나섰지요. "학교마다 컴퓨터를 보내자" 등 정보화 캠페인도 다양했습니다. 그때 '정보화 트리오(인보길, 이진광, 이성복)'가 어느 신문사보다 가장 먼저 앞장섰던 조선일보 정보화 과정을 간단히 말씀드릴까 합니다.

    1993년 코리아나호텔 옆면에 걸린 대형 뉴스전광판도 이진광 사장의 아이디어입니다. 1994년 뉴미디어연구소를 세운 후, 1995년 3월 전광판을 위성뉴스 기반의 '시티비전'으로 개편해 국내 최초 전국 전광판 네트워크 'C-SPOT'을 개시했고, 그해 10월엔 한국 최초의 인터넷신문사 '디지틀조선일보'를 창설 출범했습니다.

    현 조선닷컴의 전신 '디지틀조선일보' 홈페이지를 개설해 멀티미디어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시작했고, 1996년 3월 위성방송용 디지털 스튜디오를 차렸으며, 정보통신 주간지 '굿모닝디지틀' 창간했습니다. 1997년 광고대행 자회사 '디지틀조선애드'를 세우고 2월 위성방송추진협의회를 구성했으며, 8월 코스닥시장에 등록했죠. 삼성동 한국종합전시장에서 한국 최초의 전자박람회 '컴덱스코리아 97'를 개최하고, 일본 도쿄 긴자거리에 시티비전을 가동시키고, 12월에는 전국 30여개 대학과 '한국대학가상교육연합'을 결성하기도 했습니다. 1999년 조선일보의 신문전산제작시스템(CTS)를 한글판 버전으로 전면개편, 'C-III'를 실행시킨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공적이죠.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숨 가쁜 이진광의 천재적 두뇌 사이클을 누가 따라가랴. 조선일보의 정보화혁명을 성공시킨 콤비는 인터넷매체 뉴데일리를 인수한 후 전면개편, 급성장시키며 올해 창간 20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Q. 조선일보 편집기자 시절부터 인터넷신문 경영자로 변신하기까지 수많은 저명 언론인들과 호흡을 맞춰오셨는데요. 이 순간 가장 기억에 남고 고마웠던 분들을 꼽아 보신다면? 구체적으로 회장님이 '일반인'에서 '기자'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주셨거나, 난관에 봉착했을 때 든든한 우군이 돼 줬던 동료, 선후배들이 계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 조선일보 입사이래 키워주고 이끌어주신 은인들이 참 많습니다. 첫 손가락에 꼽으라면 가장 존경하는 방우영 회장입니다. 선배로는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현 출판사 '기파랑' 회장) 등 몇 분과, 동고동락해 온 이진광-이성복 두 분이 평생의 브로맨스 같습니다(웃음).
  • ▲ 인보길 뉴데일리미디어그룹 회장. ⓒ정상윤 기자
    ▲ 인보길 뉴데일리미디어그룹 회장. ⓒ정상윤 기자
    "저의 건강 보약은 이승만"

    Q. 회장님께선 자타공인, 우리나라 최고의 이승만 전문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뉴데일리를 인수한 이듬해인 2010년 '이승만연구소'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이승만 포럼'을 개최하면서 소위 '이승만 알리기'에 전력을 기울이고 계신데요. 이승만 대통령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궁금하고요. '기자인생 60년' 가운데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인간 이승만'은 회장님에게 어떤 존재인지도 듣고 싶습니다.

    - 2010년부터 '이승만 포럼'을 시작한 경위는 이러합니다. 소위 4.19세대로서 1960년 4월 19일 대학교 2학년생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참가합니다. 경무대(대통령관저) 앞에서 대학동문이 피살된 이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인식은 '독재자'였지요.

    그것이 뒤집힌 계기가 찾아옵니다. 1995년 광복(해방)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조선일보가 '이승만 나라세우기' 전시회를 열며 이승만 자료집을 발간했죠. 그 자료를 본 뒤에서야 55세 편집국장은 역사의 진실에 눈이 떠졌습니다. 그후 이승만에 대한 책들을 읽다가 뉴데일리를 인수한 후 '이승만 다시 보기' 책을 내고 '이승만 포럼'을 매달 1회 개최했습니다. 5년 전엔 '이승만 현대사 - 위대한 3년'이란 책도 출간했지요. 지금은 이승만의 생애를 관통하는 '이승만 건국사'를 마무리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작년부터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 주도자인 윤석열 대통령의 손발이 묶여버렸습니다. 하지만 '사필귀정'이라 자유민주공화국은 다시 일어납니다.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도 반드시 건립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승만이 만든 헌법체제와 한미안보동맹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는 중-북-러의 노예가 돼버릴 갈림길에 놓이게 됩니다. 지정학적 글로벌 전략가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정신, 반공주의, 반외세 독립정신'으로 나라를 세우고 지켜낸 강력한 리더십이 바로 지금 간절한 까닭입니다. 이승만은 당신 옆에 살아있습니다. 건국의 아버지 위상에 맞는 기념관을 지어 '국민교육장' '국민 놀이터'로 만들어 이승만이 부르짖은 '자유의 십자군'을 대거 양성해내고 그 자유정신으로 자유통일을 결단코 이룩할 것입니다. 트럼프의 '북한도박' 카드도 그렇게 활용되는 결과를 낳으리라 예상합니다.

    Q. 얼마 전 회장님께서 무거운 정수기 물통을 번쩍 들어 교체하시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곁에서 뵈면 그 흔한 감기조차 잘 안 걸리시는 것 같고…. 꾸준히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회장님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후배들에게 좀 전수해 주십시오.  

    - 왜 이 나이에 건강하냐고요? 저의 보약은 이승만입니다. 그 분은 73세에 강대국들과 싸우고 싸워서 나라를 세웠고, 80세에 한미동맹까지 쟁취합니다. 그의 삶을 보면 볼수록 그야말로 '나이는 숫자'란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늙을 틈이 없는 자유분방한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이승만은 평생 특별한 운동도 하지 않았지만 90세를 살았습니다. 아무거나 잘 먹고 잘 자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타고난 건강체라 말하는데 그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의 굳센 신념과 불굴의 용기와 지혜로서, 전 세계를 한눈에 꿰뚫어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전략전술 구사에 헌신했던 열정 덕분일 것입니다. 오늘의 난세를 뚫고 나가는 자유민주주의 리더 뉴데일리 여러분도 그러하리라 믿습니다. 건강의 묘약은 '착한 열정'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