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유민 받아주고 6.25 파병해준 친구-형제 같은 나라"한국인은 이제 세계시민...인류애를 보여주고 있다"
  • ▲ 명민호 작가가 SNS에 올린 그림이 심금을 울렸다. 6.25 전쟁고아를 보살피는 터키군인 모습과 지진현장에서 한국구호대원이 지진피해 소녀를 보살피고 있는 모습을 대비해 그렸다. ⓒ명민호 작가 인스타그램
    ▲ 명민호 작가가 SNS에 올린 그림이 심금을 울렸다. 6.25 전쟁고아를 보살피는 터키군인 모습과 지진현장에서 한국구호대원이 지진피해 소녀를 보살피고 있는 모습을 대비해 그렸다. ⓒ명민호 작가 인스타그램
    ‘터키’란 국호가 더 친숙한 튀르키예(돌궐=突厥)

    터키 노래 중에 우리한테 익숙한 게 하나 있다.
    “우스크다라 기더이켄 일디다비르 야그무르~~~”

    지금도 일산이나 파주에 오래 시셨던 80대 이상의 많은 분들은
    이 노래를 흥얼거리신다.
    이 가사대로가 아니라,
    "위스키달라 기다려라 소주가 나간다"로 부르기는 하지만,
    음율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터키 군이 73년 전 겨울 한국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북한 인민군이나 중공군의 공격이 아니었다고 한다.
    바로 추위였다.
    그들은 혹독한 추위를 이기려 모닥불 피워 놓고 둥글게 빽빽이 붙어 앉아
    바로 이 노래, 즉 <우스크다라>를 불렀단다.
    모닥불 앞에서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고국의 민요이자 유행가를 부른 것이다.
    우리의 <아리랑>처럼.

    이 가사가 우리들 귀엔 ‘위스키달라’로 들렸다.
    터키군이 주둔했던 동네 근처에서 밤에 <우스크다라> 노랫소리가 들려오면,
    한국인들도 "위스키달라 기다려라 소주가 나간다" 하며 흥얼거렸고,
    터키군이 지나갈 때면 손 흔들며 <위스키달라> 노래를 했단다.
    10여 년 전에 일산-파주 근처에서 주민들한테 직접 들은 말이다.
    황진하 UN키프로스평화유지군 사령관(현 한미우호협회장, 18대 국회의원)도 확인해준 사실이다.

    1만5천여명 파병에 1천여명 전사

    터키는 미-영-캐나다 다음으로 많은 연대급 전투병 1만 5천 여명을 파병했다.
    한국 도착 순서로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다.
    1천 여명이 전사했고,
    그 가운데 462명은 부산 UN기념공원에 잠들어 있다.

    6·25가 터졌을 당시 터키는 중립국이었다.
    자유민주국가도 공산국가도 표방하지 않았지만,
    침략행위에 대한 UN의 공동대응에 흔쾌히 호응,
    풍전등화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하러 나선 것이다.

    오스만제국의 후예답게
    터키군은 중공군을 상대로 그 용맹함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평안남도 개천군 전투에선 중공군 인해전술에 밀렸지만,
    용인의 기흥 전투에선 중공군 474명을 격퇴했다.
    경기도 연천군 전투에선 66명이 전사하는 등 큰 손실을 보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등,
    서부전선을 지켜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정전협정 두 달을 앞둔 개성전투에선 이틀 동안 진지를 7차례나 뺏고 뺏기면서
    중공군에 사상자 3천여 명의 타격을 가하는 용맹을 전세계에 과시했다.
  • ▲ 터키 제작 영화 <아일라> 포스터. 한국전쟁고아를 돌본 터키군인이 노년에 이 소녀를 찾는 실화에 바탕한 영화다.
    ▲ 터키 제작 영화 <아일라> 포스터. 한국전쟁고아를 돌본 터키군인이 노년에 이 소녀를 찾는 실화에 바탕한 영화다.
    영화 <아일라>, 6.25 전쟁고아 찾는 터키 노병 이야기

    터키군은 주로 미군과 함께 중공군과 맞서 싸웠다.
    이 와중에 229명이 포로가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터키군은 막사에서 고아들을 키울 정도로 따뜻하고 정이 많았다.
    그때 막사에서 키웠던 5살짜리 한국 여자고아를 잊지 못해
    인생 후반기에 그 아이를 찾아 나섰던 터키 군인의 따뜻한 이야기는,
    터키 영화 <아일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터키에선 500만 명 이상이 관람했단다.
    그러나 한국에선 2주 만에 막을 내려야 했던 슬픈 영화다.

    이렇게 용감하면서도 따뜻한 인간애로 73년 전에 대한민국을 도왔던 터키.
    얼마전 국호를 튀르키예로 바꾼 그 나라에
    지난 2월 6일 진도 7.8의 강진이 들이닥쳤다.
    일주일 만에 사망자가 4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참혹한 재해를 맞은 것이다.

    '역사의 조난자'와 <물망초>의 튀르키예 돕기 운동

    강진 소식이 전해진 지 이틀 만에
    사단법인 <물망초>는 튀르키예 돕기 운동을 펼쳤다.
    73년 전에 터키가 우리를 열과 성을 다해 도왔듯,
    이제는 우리가 돕자고 <물망초> 회원들과 SNS 친구들에게 호소했다.

    <물망초>는 ’역사의 조난자‘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사단법인이다.
    ‘역사의 조난자’는 자기 잘못 없이 고난을 당하게 된 사람들을 뜻한다.

    사할린에 끌려간 한인,
    만주 주둔 일본군 731부대의 생체실험 희생자,
    중앙아시아에 버려진 까레이스키(고려인),
    민간여객기-어선 등 납북피해자,
    6.26 국군포로,
    탈북자 등등.

    이들 ’역사의 조난자‘들을 도우면서 동시에,
    6·25때 우리를 도왔던 64개국에도 감사함을 전하는 활동도 함께 하고 있다.
    그러니 <물망초>가 튀르기예의 아픔에 당연히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 ▲ 튀르키예 돕기운동 포스터. ⓒ물망초
    ▲ 튀르키예 돕기운동 포스터. ⓒ물망초
    참전용사와 그 후손, 그리고 지진고아를 위해

    모금을 하면서도,
    그 취지를 우리 물망초의 성격(정관)에 맞게 제한해서 공지를 했다.
    첫째 강진 피해자 가운데 6·25 참전용사와 그 후손들을 돕고,
    둘째, 강진으로 인해 발생한 고아들을 돕겠다고 밝혔다.

    모금을 시작하면서 사실 걱정이 많았다.
    2월 말까지를 기한으로 성금을 모으기로 했는데 안 모아지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컸다.
    기부문화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우리 현실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우였다.
    모금 시작 엿새 만에 3천만 원이 모아졌다.
    1백만원이 넘는 큰 액수를 보내주신 분들도 계셨지만,
    대부분이 1만 원 정도씩 보내주셨다.
    대략 2,500여 명이 엿새(만으론 닷새) 만에 3천만 원 이상을 보내주신 것이다.

    너무 감사했다.
    다행히 그 날은 발렌타인데이 전날이었다.
    그리고 튀르키예 대사관에 설치된 조문소가
    그 다음 날인 15일에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래서 1차로 3천만원을 먼저 전하기로 하고,
    입금통장을 전부 스캔해서 <물망초>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블로그 등 SNS에 올렸다.
    기부금품 모집과 사용은 투명해야 한다는 지론에 따라
    우리 <물망초>는 모든 것을 다 공개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당연한 처사였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받아 들여지기도 한 것 같다.

    아무튼,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에
    <물망초> 이사님들과 사무국직원들이 터키 대사관을 방문,
    1차 성금을 전달했다.
    원래 발렌타인 데이는 여자가 남자한테 초코랫을 주는 날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는 날이니까.
  • ▲ 사답법인 물망초의 박선영 이사장과 사무국 임직원들이 튀르키예 대사관을 방문, 1차 모금액을 주한 튀르키예 대사에게 전달하고 있다. ⓒ뉴데일리
    ▲ 사답법인 물망초의 박선영 이사장과 사무국 임직원들이 튀르키예 대사관을 방문, 1차 모금액을 주한 튀르키예 대사에게 전달하고 있다. ⓒ뉴데일리
    "한-튀르키예, 고구려때부터 친구였다"

    불과 넉 달 전 부임한 신임 살리 무랏 타메르 주한 튀르키예 대사는
    우리가 부끄러울 정도로 고마워 하며 이렇게 말해 주었다.

    "멀리 고구려 시대부터 한국과 튀르키예는 이미 동맹관계였다.
    단지 6·25때 파병한 것만이 우리 두 나라 역사는 아니다."

    사실 터키와 한국은 지구 상에서 많지 않은 우랄알타이어를 사용하는 민족이기도 하고,
    대사가 말한 고구려 시대 역사는
    고구려와 돌궐과의 동맹관계를 말한다.
    요즘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지만,
    80년대까지는 고구려 후기를 가르칠 때 돌궐에 대한 역사가 많았고, 재미도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돌궐은 고구려 유민 약 20만 명을 받아들여 몽골지역에서 큰 활약을 했다.
    사실 돌궐(突厥)이라는 한자는 투르크를 중국어 발음 해당 한자로 독음화한 것이고,
    우리는 그 한자를 우리 식으로 읽은 것이다.
    사실 터키라는 용어보다는 튀르키예라는 국명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주한 튀르키예 대사는
    우리에게 고구려 역사와 2002년 월드컵 3-4위전까지 거론하며
    "이번에 확실하게 우리 두 나라가 형제국임을 확인했다"고 했다.
    1시간 가까운 면담 후엔,
    대사관 밖에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해주었다.

    세계시민으로서의 책무

    돌아보면 우리와 터키의 역사가 언제부터 형제가 되었든지 간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세계시민으로써 당연히 아픔을 겪는 나라와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그것이 홍익인간의 정신이고 인류애의 실천이다.

    그러니 수 만 명이 목숨을 잃고, 다치고, 갈 곳이 없어진 사람들과 그 국가는
    형제 국가가 아니더라도 당연히 도와야 한다.
    하물며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우리 대한민국을 목숨 바쳐 구해준 나라 아닌가.
    그러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제 우리 대한민국은,
    73년 전 세계 최빈국에서 오늘날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우뚝 올라섰다.
    이게 다 누구 덕분이겠는가?
    기쁜 마음으로 두 팔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터키, 아니 튀르키예를 도와야 한다.
    까치도 은혜를 갚는다는데...
    홍익인간을 지향하는 우리가 아닌가.

    튀르키예돕기 물망초 2차 모금안내
    국민은행 782701-04-094924
    신한은행 140-009-725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