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블랙아웃' 피해자에 '심신상실' 인정… "제반사정 고려없이 블랙아웃으로 봐선 안돼"
  • ▲ 법원. ⓒ정상윤 기자
    ▲ 법원. ⓒ정상윤 기자
    성추행 피해자가 '블랙아웃(Black out)'으로 당시 정황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준강제추행죄를 인정해야한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술에 만취한 상태라면 심신상실 상태로 볼 수 있고, 범행 당시 성접촉에 동의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취지다. 

    21일 법원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은 준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A(32)씨의 상고심에서 무죄판결을 한 원심 판단을 깨고 사건을 유죄 취지로 수원지법에 환송했다. 

    A(당시 28세)씨는 2017년 2월 24일 새벽 술에 취한 피해자 B(당시 18세)양를 만나 경기도 안양시의 한 모텔로 데려가 입을 맞추고 신체 일부를 만지는 등 준강제추행한 혐의를 받는다. B씨는 A씨를 만나기 전 남자친구인 김모 씨와 소주 2병을 마시는 등 평소 주량보다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다. A씨는 B양과 함께 B양의 일행을 찾아보다가 힘들어하는 B양을 데리고 모텔로 갔다. 이후 남자친구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A씨는 모텔에서 B양과 키스를 하고 추행한 점은 인정했지만, B양의 자발적 의사가 있었기 때문에 준강제추행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양치질을 하고 샤워실을 나오니 B양이 스스로 상의를 벗고 잠들어있었다고도 했다. 재판과정에서도 A씨와 B양이 일행과 소지품을 찾기위해 가게들을 둘러본 것을 목격했다거나, B양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모텔 직원들의 증언 등이 나왔다. 

    1심은 A씨의 준강제추행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10월 및 40시간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를 선고했다. 반면 2심은 B양이 당시 의식이 있었지만 술에 취해 기억을 못하는 '알코올 블랙아웃' 상태로 볼 수 있다며 A씨에게 1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블랙아웃이란 술이나 약물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단기적 기억상실 현상을 뜻한다. 

    2심은 "A씨가 B양의 심신상실 상태를 인식하고 이를 이용해 고의로 준강제추행을 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B양의 당시 정황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A씨와의 성접촉에 동의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봤다. 또 B양의 연령과 A씨와의 관계, 만나게 된 경위 등을 고려하면 B양의 심신상실 상태를 인정할 수 있다고도 봤다. B양이 평소보다 많이 술을 마셔 일행과 소지품을 찾을 방법을 알지 못했고,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처음 만난 상대와 모텔에 들어갈 가능성이 낮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피해자는 이 사건 당시 짧은 시간 동안 다량의 술을 마셔 자신의 일행이나 소지품을 찾을 방법을 알지 못했다"라며 "처음 만난 김씨와 함께 숙박업소에 가서 무방비 상태로 잠이 들어 추행을 당할 당시 심신상실 상태에 있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피해자와 김씨의 관계, 함께 숙박업소에 간 경위 등에 비춰볼 때 피해자가 김씨와 성적 관계를 맺는 것에 동의했다고 볼 정황을 확인할 수 없다"면서 "이러한 제반 사정에 대한 고려 없이 블랙아웃이 발생해 피해자가 기억을 못 한다는 이유만으로 동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