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장군 때문에 적화통일에 실패했다고 생각… '철천지 원수'로 여겨
  • ▲ 2019년 3월 1일, 38개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친일김백일동상철거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가 경남 거제시에 있는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에 있는 김백일 장군 동상 바로 옆에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왼쪽이 김백일 장군 동상, 오른쪽이 단죄비. ⓒ연합뉴스
    ▲ 2019년 3월 1일, 38개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친일김백일동상철거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가 경남 거제시에 있는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에 있는 김백일 장군 동상 바로 옆에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왼쪽이 김백일 장군 동상, 오른쪽이 단죄비. ⓒ연합뉴스
    민족문제연구소 등 좌파단체들이 대전 국립현충원 안에서 몇몇 6·25 영웅들의 봉분을 발로 밟고 오물을 투척하는 등 패륜적인 행패를 부렸다는 소식을 듣자 중국 문화혁명 때 벌어졌던 집단 광기(狂氣)의 일단(一端)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들이 신성한 국립묘지에서 국민적 영웅을 상대로 이렇게 패륜적인 난동을 부릴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정권이 자기들을 비호해 줄 것이란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현충원 측은 이들의 시위를 용인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이들의 요구로 백선엽(1920~2020) 장군 묘소 안내판을 당일 바로 철거하는 작태를 보였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무혐의로 이 난동 사건을 종결했다. 지난 2019년 6월 6일 현충일에는 좌파단체 회원들이 모형 삽을 들고 유공자 봉분에 올라타 파묘(破墓)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이들 좌파단체의 이른바 ‘6·25 영웅 모욕주기’는 백선엽 장군에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백선엽 장군 못지않게 이들의 집요한 타겟이 된 이로는 김백일(1917~1951) 장군이 있다. 김백일 장군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작전회의를 마치고 복귀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순직했다.

    흥남철수에서 10만 명을 구한 김백일 장군도 모욕


    김백일 장군은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지휘관인 알몬드 10군단장을 설득해 부둣가에 몰려든 10만여 명의 북한 동포를 구출하는 데 공헌했다. 당시에 미군에게 피난민 수송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김백일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육군총참모장이었던 정일권 소장은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남겼다.

    "이봐 일권이(정일권과 김백일은 막역한 사이였다), 우리는 군인이니까 미군 친구들 덕분에 여길 빠져나갈 수 있겠지. 하지만 여기 북한 동포들은 어디로 가나? 산으로 가나? 바다로 가겠나? 모두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하고 온통 아우성이야. 북괴 놈들이 똥되놈(중국군)과 함께 쳐내려오면서 무지막지한 보복을 하고 있다는 거야. (중략) 그런데도 우리 군대만 빠져나가겠다는 건가? 나는 데리고 가겠어. 알몬드는 아마 못하게 하겠지. 군대 수송 때문에 안된다고 하겠지. 하지만 두고 보라고.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동포들을 배에 태우겠어. 그러니 이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시끄럽게 굴면 잘 수습이나 해 주게."

    2011년 5월 함경도 도민들은 이런 김 장군의 은혜를 기리기 위하여 십시일반 모은 성금으로 거제 포로수용소에 있던 ‘흥남철수기념 조형물’ 옆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그러자 그해 7월 이른바 ‘거제시민단체체연대협의회’라는 10여개의 단체 대표로 구성된 사람들이 몰려나와 “김백일은 악랄한 친일파로서 항일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투쟁하던 독립군의 전문 토벌대인 간도특설대의 장교였다”며 “8월 15일까지 동상을 설립한 당사자들이 직접 철거하지 않으면 시민의 이름으로 직접 철거하겠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흥남철수작전 기념조형물 옆에 있던 김백일 장군의 동상에 검은 천을 덮고 쇠사슬을 묶은 별난 퍼포먼스를 벌였다. 당시 김백일 장군의 동상 철거 촉구를 결의한 거제시의 의원 15명 가운데 9명이 한나라당(현 국민의 힘) 소속이었다. 2019년에는 좌파단체들이 김백일 장군 동상 바로 옆에 동상 높이(3m)와 비슷한 이른바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라는 것을 세워놓았다.

    좌파들이 유독 백선엽·김백일 두 장군을 미워하는 이유


    이들 좌파단체가 백선엽·김백일 6·25 영웅에 대해 집요하게 파묘와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이른바 ‘친일파청산’이라는 명목이다. 과연 그럴까?

    이들 좌파단체가 친일파를 그렇게 미워하고, 이른바 ‘민족정기 바로 세우기’에 사명을 가졌었다면 모든 친일파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에 의한 ‘정의감’을 표출해야 정상이다.

    반민족 특별법 추진에 앞장섰던 신기남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부친 신상묵(1916~1894: 시게미쓰 구니오)은 독립운동가를 잡아 고문하던 악랄한 일본육군 헌병 오장(伍長) 출신으로 밝혀졌지만,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3095명의 친일인사 명단에서는 제외되어 논란을 일으켰다.

    ‘독립군 손녀’라는 타이틀로 국회의원까지 되었던 김희선 전 열린우리당 의원의 아버지 김일련(가네야마 에이이치)은 일제하 만주 특무경찰을 지낸 것으로 밝혀졌지만, 역시 친일인명사전에서 빠졌다.

    동학농민운동에 불을 지핀 고부군수 조병갑의 증손녀인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 부친은 일제시기 통감부 기관지인 친일신문에서 기자와 주필 및 편집국장을 지낸 인물로 밝혀졌고, 수년 전에는 민주당 원내대표였던 홍영표 의원의 조부 홍종철이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3년이나 지낸 엄청난 부자로 드러나 홍 의원이 사과하기도 했다.

    위에 열거한 이들은 동족을 잡아 고문하고, 고혈을 착취하고, 일제에 온몸을 바쳐 헌신한 ‘악질 친일파급’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후손은 직계 선조의 친일행각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공부를 하고, 대한민국에서 출세한 경우에 속한다.

    하지만 이른바 좌파단체들이 이들의 친일행각을 문제 삼아 ‘부정 재산몰수나 공직사퇴’, ‘친일파 등재’, ‘파묘’ 등의 시위나 퍼포먼스를 벌인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즉 좌파단체들이 ‘민족정기’ ‘친일파청산’ 운운해온 것은 이들이 진짜 친일파를 미워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들이 유독 6·25 영웅인 김백일·백선엽 두 장군에게 집요하게 적개심을 표출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두 장군의 공통점은 공산당과 싸웠다는 것


    이 두 장군의 공통점은 김일성과 싸워서 나라를 공산화 일보 직전에서 건져냈다는 것과 일제하 만주국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현재의 중국공산당 전신인 팔로군과 싸웠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 좌파에게 김백일·백선엽 같은 장군은 대한민국의 적화통일을 막고, 김일성을 곤경에 빠뜨린,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태생적 원수’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좌파단체들은 김백일·백선엽 같은 6·25 영웅들이 복무했던 일제하 간도특설대가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하고 조선인을 학살한 악랄한 부대라고 선동하고 있다. 하지만 만주에서 실제 독립군을 토벌한 부대는 일본의 조선 침략부대(간도토벌대)로 백선엽·김백일이 소독되었던 만주국(1932년 건국)의 간도특설대와는 다른 부대 조직이라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김백일은 서울의 보성(普成)중학을 마친 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했고, 1937년 9월 5기생으로 졸업했다. 만주국에는 봉천(奉天)과 신경(新京·만주국 수도·오늘의 장춘) 두 개의 군관학교가 있었다. 봉천군관학교는 2년제였는데, 1939년 4년제인 신경군관학교가 설립되면서 폐지됐다. 광복 후 건군의 주역들 중에 김백일, 백선엽, 정일권 등이 봉천군관을 졸업했고, 박정희, 이한림 등은 신경군관학교 출신이다.
     
    1938년 12월 일제가 간도 연길에서 간도특설대를 창설하자 김백일은 이 부대에 간부(소위)로 합류한다. 간도특설대는 조선인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조선인특설부대’라고도 불린다.

    백선엽은 1939년 평양사범을 졸업한 후 이듬해인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했다. 1941년 12월 졸업한 백선엽은 그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견습사관으로 만주군 보병 제28연대에 근무하게 된다. 그러다가 1943년 현재의 연변조선족자치주인 간도특설대로 전임되었다. 백선엽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배치되었을 때 중대장이 바로 김백일 장군이었다.

    간도특설대는 주로 만주에서 치안활동 담당


    당시 만주 일대에는 80만 명의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었고(1932년 통계에 82만명) 공산군의 게릴라 활동이 빈번해 치안이 몹시 불안한 상태였다.

    만주 신경군관학교를 나온 김석범(해병대 중장) 장군은 그의 저서 《만주국군지》에서 일제의 간도특설대 창설 이유에 대해 “한인 사회에서는 국군(國軍·만주국군)에 참가를 지원하는 공기가 농후하여 국경감시대에 대체할 한인부대의 편성이 요망되었다”며 “그 결과 한인거주지역에 한인부대를 배치하는 정책적 고려하에 간도특설대를 창설하게 되었다”고 기술했다.

    《한국전 비사》(사사키 하루타카)에는 “간도특설 경비대는 당시 백두산 주변의 변경에서 김일성 게릴라라고 칭하는 반만주 항일 분자의 준동이 계속되었으므로 한국 출신의 우수한 자를 모아 대 게릴라 부대를 편성해서 치안유지에 임하게 했다”고 밝혔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는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중국공산당은 유격대 창설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이른바 ‘동북항일연군’이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공산혁명을 이루기 위해 결성한 유격대(게릴라) 조직으로, 세계의 공산화를 꿈꾸는 소련 코민테른의 원칙에 따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도 유격대를 창설했다.

    간도특설대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창설되었으며, 일제가 만주에서 활동하는 공산게릴라(동북항일연군)를 추적, 소탕하기 위해 만든 대 게릴라전 부대의 성격이 강했다.

    1930년대 청산리 전투의 주역인 김좌진 장군이 공산분자에 의해 피살되고, 만주국이 설립되면서 우파 민족주의 세력의 항일 무장투쟁은 사실상 끝나버렸다. 반면 동북항일연군에 조선인 게릴라 조직들의 대일항쟁 목적은 기존의 민족주의 독립운동 단체와 달리 소련의 지령에 따라 자국과 세계의 공산혁명을 달성하는 데 있었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에 조선인이 가장 많이 배치되었고, 1로군에는 4, 5, 6사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조선인으로만 구성된 6사를 김일성이 맡고 있었다.

    마적단에 가까운 김일성 부대


    동북항일연군 관련 다수의 연구 논문에는 이들 게릴라 부대는 엄격한 군율이 없었고 중앙의 보급품 지급이 없었기 때문에 항일투쟁이 아니라 주민을 약탈하는 ‘마적단’에 가까웠다고 기술한다. 당시 간도 일대에 거주했던 조선족들은 이들 동북항일연군을 마적단으로 인식했다는 증언과 기록이 다수다.

    이 당시 장백현 오지에 밀영(密營)을 두고 활동하던 김일성 부대는 물자 부족에 허덕였다. 김일성은 장백현 일대와 갑산군 일대의 한인(韓人) 농촌을 기습하여 부족한 물자를 조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자 부족에 허덕이던 김일성 일당이 1937년 6월 압록강 너머 혜산진 보천보 지서를 습격한 사건이 바로 보천보 사건이다.

    기관총 소리에 놀란 일경 5명이 피신하자, 김일성 부대는 기관총 1자루와 소총 몇 자루를 훔쳐서 달아났다. 이 과정에서 면사무소와 우편소에 불을 질렀는데 민간인 2명이 이때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은 이 보천보 전투를 항일투쟁 이력으로 내세워 북한에서 권력을 강화했다. 1940년이 되면서 동북항일연군 조직이 무너지면서 김일성은 소수의 무리를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도피했고, 이후 소련군 적군 88여단의 대장이 되고, 이를 바탕으로 광복 후 북한의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태평양 전쟁 시기에 총 한번 쏘지 않고 소련군 영내에서 편하게 지낸 인물이 김일성이다.

    김일성과 유독 악연이 많은 김백일·백선엽


    동북항일연군의 무장투쟁이 한풀 꺾이자 일제는 중국 서부에서 압박해 오는 중국공산당 소속의 팔로군에 대항하기 위해 간도특설대를 만주국 서쪽 변경으로 이동시킨다. 1944년 늦가을에 김백일과 백선엽 장군이 소속된 부대는 만리장성을 넘어 팔로군 토벌전에 투입되었고, 이후 연길 지역에 치안활동을 담당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의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강력한 한인부대를 한민족 독립 항쟁지였던 간도에 두는 것이 불안해 공산군이 준동하는 열하(熱河) 및 만리장성 서쪽인 기동지구에 출동시킨 것이다. 간도특설대는 광복이 될 때까지 이 일대에서 중국 팔로군과 전투를 했다.

    1920~1930년대 독립군을 잔악하게 토벌한 것은 간도특설대가 아니라, 일본의 조선 침략군인 19사단의 간도토벌대다. 간도토벌대가 독립군과 전투를 할 때 김백일 장군은 3세 혹은 16세 정도의 어린 나이에 불과했다.

    김백일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있던 1940년대 당시에는 임시정부조차 이미 중경(重慶)에 가 있었고, 광복군도 그곳에서 창설되었다. 애시당초 독립군과 직접 교전이나 토벌은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이다.

    좌파 단체들은 창설연도가 다르고, 활동한 시기와 종사한 업무가 다른 별개의 부대를 같은 부대처럼 혼동하여 주장함으로써 김백일 장군이 마치 독립군을 토벌한 것처럼 조작하는 전법을 구사해 왔다.

    이제 좌파들이 왜 이토록 집요하게 김백일·백선엽 두 장군을 미워하며 철천지 원수처럼 여기는지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바로 이 두 장군이 종북 좌파들이 신처럼 여기는 김일성을 동북항일연군 시절에 만주에서 소련으로 쫓아냈고, 6·25 적화 직전에 북쪽 끝까지 몰아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다.

    (본 칼럼은 월간조선 2011년 9월호 이상흔 기자의 <6·25 영웅 金白一 장군의 삶… 그들은 왜 김백일을 악질 친일파로 모는가?>를 참조로 작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