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엑소시즘 부르는 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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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처구니가 없다.
    '최순실 언니' 하나 때문에 나라 꼴이 진도(震度) 8 지진이다.
    대통령의 영(令)이 서지 않고 청와대 비서실이 개점휴업이고
    정부가 속수무책이고 여당이 빈 깡통이 되었다.
    통치도 없고 정치도 없고 깃발도 없고 리더십도 없다.
    국가 운영이 흐트러지는 데 단 며칠이 안 걸린 셈이다.

    일각에선 "이참에 갈아엎자"고 한다. 어찌할 것인가?
    파국을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그럴 순 없다.
    통치 시스템의 변동이 불가피하다 해도
    그걸 순리적인 방식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파국적인 방식은 리스크가 너무 크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러나 최악의 사태를 설정해야 한다.
    정권이 무너지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유당 정권, 유신 정권, 5공 정권도 임계점에 다다르자 순식간에 휘청했다.
    넥타이 부대, 시장 상인, 일반 시민까지 등을 돌리면 정권은 와장창한다.
    그런 조짐이 이미 보인다.
    최순실 모녀의 갑(甲)질, 무교양, 방자함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가 차해 하고 있다.
    국민정서법이다. 이게 폭발하면 산사태를 막을 길이 없다.
    이 이치를 안다면 신속히 대처하되, 타이밍을 놓치면 그나마도 무효다.

     박근혜 대통령은 무얼 어떻게 해야 하나?
    최순실 커넥션을 성역 없이 파헤쳐야 한다.
    꼬리 자르기를 하거나 면죄부를 주려 했다간 더 큰 화를 부를 것이다.
    최씨 일족과 맺어온 긴 악연을 단호히 끊어버려야 한다.
    우병우, 안종범, '문고리 3인방'에 이어 문화체육관광부 안팎 최순실 인맥과 프로젝트도
    가차 없이 도려내야 한다.
    대통령은 외교·국방·대북(對北)에 전념하고 다른 분야는 책임총리에게 맡기는 안(案)도
    경청할 만하다. 김정은 핵(核)엔 한·미·국제 공조로 일관되게, 차질 없이 대응해야 한다.
    이 필요엔 하야(下野)니 거국 내각이니 하는 건 맞지 않는다.
    사드 찬성과 사드 반대가 어떻게 한 내각에 있나?
    박근혜 시대가 잘 마무리되기를 바라온 진영엔 '지켜줄 명분'을 주어야 한다.
    혁신이 지체될수록 그 명분은 약화될 것이다.

     여당은 어떻게 해야 하나?
    친박이나 비박이나 이젠 엔진이 꺼져버렸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괜찮은 사람들이 있다.
    이 원내(院內)가 원외(院外)의 자유민주 시민사회와 코드를 맞춰
    여권 안의 최순실적인 것들, 불난 집에서 잇속 챙기려는 얌체들, 그리고
    바깥의 급진 과격에 맞서 새 중심을 잡아갔으면 한다.
    야당은 어떻게 해야 하나?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최순실 국정 농단'으로
    '송민순 회고록'을 물타기 하려 해선 안 된다.
    "최순실에게 물어보자"고 한 게 국기 문란 오십보(步)였다면
    "북한에 물어보자"고 한 건 국기 문란 백보였다.
    이 스캔들이 신문·방송에선 '최순실 효과'로 덮이고 있지만,
    대선 때는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를 것이다. 떠오르게 해야 한다.

      친노·친문 운동권 아닌 야당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김종인·손학규·안철수 등이 운동권 야당보다 유연한 길을 가려 하는 게 사실이라면,
    오늘의 핵위기와 정정(政情) 불안이야말로 그걸 입증해 보일 절호의 기회다.
    그들이 운동권 야당과 다를 바 없이 "이 기회에 싹쓸이하자"는 쪽으로 나간다면
    그들의 '제3의 길' 명분은 없어지고, 더불어민주당 2중대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 그들이 "박근혜 정권에 반대하지만 극단적 타파-국정 공백-헌정 중단에도 반대"라는 것을 천명하면 그들은 더불어민주당을 제치고 유력한 대안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다.
    중도·보수 일부가 극렬 야당보다는 그쪽으로 눈을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기민한 대처, 여야 각 당의 적절한 대응은 그러나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일 뿐이다.
    이게 제때에 되지 않아 차일피일 끌 때는
    사태가 어떻게 급전(急轉)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4·19 혁명을 불러온 3·15 부정선거 때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는 사퇴를 표명했다.
    그런데 비서실장이 성명서를 쓰면서 '사퇴한다'를 '사퇴를 고려한다'로 바꿨다.
    이게 화약고에 불을 댕겼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되었다.

    유신 말기, 5공 말기에도 그런 판단 착오가 있었다.
    김재원 정무수석이 다 같이 사퇴하자고 했을 때
    우병우·안종범 두 수석이 극구 반대한 것도
    불길에 기름을 부은 짓이었다.
    이념적으로 편향된 사람들이 움직이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중도·보수마저 그렇게 해서 화나게 하면 그땐 걷잡을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주변의 삿된 기운을 지체 없이 퇴마(退魔)할 것인가, 못할 것인가?
    연착륙이냐 경착륙이냐가 거기 달렸다.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