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70년 정리 차원에서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싶어했지만…
  • '작가 이호철'에 관한 명상
     

     

  • 문단 원로 이호철 선생이 회천(回天)했다.
    나는 그 분을 1960년대 후반에 처음 만나 볼 수 있었다.,
    중앙일보 출판국에 다닐 때 이호철 선생은 월간중앙에 연재되던
    자신의 소설 원고를 직접 들고 편집진을 찾아오곤 했다.
    당시 월간중앙 문학담당 기자로는 역시 작가였던
    고(故) 한남철 군(君)이 있었다. 내가 그를 군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은 그와 내가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시절, 교양학부의 한 반에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 이호철’은 원고를 넘긴 다음엔 으레 한남철군과 나를 구내다방으로 불러 차를 한 잔 하곤 했다.

      ‘작가 이호철’을 나로서는 문학적으로야 어떻다 평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작가 이전’의 ‘인간’으로서는 그는 1951년 초의 1. 4 후퇴‘ 때 단신 북한 땅을 떠나 부산으로 남하한 인사라는 점, 그러면서도 남한의 권위주의 정권과는 순탄치 않은 관계에 있었다는 점, 그러면서도 북한의 폭정은 용납하지 않았다는 점, 그러면서도 분단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만은 항상 멈추지 않았던 인사로 나는 기억한다. 그 만큼 ’작가 이호철‘은 단순한 분류법에 해당하는 타입이 아니라 인간사의 착잡함, 다면성, 복잡성을 동시에 바라보고 느끼려 한 지식인이었다고 나는 회고한다.

     ‘ 작가 이호철’은 언젠가 한남철 군과 내가 있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군사파시즘이라는 게 뭔지를 정말 피부로 느꼈다니까...” 이름도 성도 모르는 모기관원이 찾아 와 대뜸 ‘협박’부터 하더라는 것이다. 잡아가는 것도 아니고, 흔한 말로 ‘대화로 푸는 것’도 아닌 채, 그냥 “너 죽을 수 있어” 하는 식의 쌩 겁을 주고 가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도대체 있읋 수 있느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그가 그 만큼 ‘진보적’이었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내 말은 아직 안 끝났다.

      그로부터 50년. 나는 80세의 문단원로가 된 ‘작가 이호철’과 재회했다. 2013년 추석 직전이었다. “그래 오랜만이야, 구파발 전철 역 앞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나지“ 하기에 후배인 내가 당연히 먼저 가서 기다렸다. 반세기만에 다시 본 ‘작가 이호철’은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얼굴은 이미 신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눈만은 여전히 형형했다. ‘작가 이호철’은 나를 데리고 단골 음식점에 들렸다가 그의 '고양 평화통일문학관'으로 갔다.

      여러 시간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다음 그는 나에게 그의 소설 '별들 넘어 저쪽과 이쪽'을 건네주었다. 소설 속 조만식 선생의 영혼은 북한 민족보위상 최용건의 영혼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이승만은 일찍이 1930년대부터 스탈린이라는 자의 본질을 꿰뚫어 보아내고 (중략) 미국 땅에서 (중략) 언젠가는 그 스탈린에게 대항하는 쪽으로 (중략) 인맥을 이뤄갔소. 1949년에 모택동이 공산당 정권을 세운 뒤에도 그이는 전혀 끄떡도 않고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었소. (중략) 초대 대통령이 된 후에도 거의 극한까지 내몰리면서도 (중략) 박헌영과 맞섰던 것이오. (중략) 그것은 바로 당대에 있어 미·소 대결의 현장이었소이다. (중략) 그로부터 다시 60년이 지나고 보니까 스탈린의 소련은 송두리째 무너지고 중국도 저렇게 엄청나게 변하고 있지를 않습니까요. 범세계적으로 이 일을 해낸 그 첫 단초(端初)가 바로 6·25 전쟁이었고, 바로 오늘의 저 대한민국 아니겠는지요."

       ‘작가 이호철’은 한 마디로, 김구 김규식마저 떠나고 미(美) 국무부 유화파가 "나 몰라라" 하는 고독한 상황에서 이승만 박사 혼자서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박헌영의 '대한민국 없애기'를 막아서야만 했던 것을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 박사가 그렇게 한지 60년이 지나 국제공산주의는 파산했고, 조만식 영가(靈駕)는 "오늘의 저 대한민국 아니겠는지요"라는 감개 어린 토로를 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나는 ‘작가 이호철’이 1970년대의 모습과는 다른, 원숙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있음을 감동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을 그 해 추석 직후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에 담아 실었다.

      ‘작가 이호철’은 한국문단 70년을 총정리 하는 심정으로 조선일보에 무언가를 연재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조선일보를 떠난 몸인지라, 그런 뜻을 전(前) 직장에 전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사적(私的) 라인에 슬쩍 흘리는 식으로 말은 해봤지만 그게 잘 되진 않았다. 그가 회천한 마당에 궁금해지는 건 그 연재가 만약 실현됐다면 그는 그 글에서 오늘의 ‘이념적’ 문단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하는 것이다. ‘별들 넘어 저쪽과 이쪽’대로라면 그의 평(評)은 무척 비판적이었을 것 같다.

      지식인이 보수적인, 또는 권위주의적인 권력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당연한 일이지,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아주 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지식인이 그렇게 하는 나머지 혁명적, 좌파적 권력의 타락과 일탈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다시 “아니요”라고 말하는 건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다. ‘작가 이호철’이 바로 그 두 가지를 다 했다고 나는 평가한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였던 장 폴 사르트르는 자본주의에 대해 무척 비판적이었다. 여기까지는 다수 프랑스 지식인들이 유행처럼 다 그랬으니, 특별하달 게 없다. 그런데 어쩌자고 그는 다 늙어가지고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에 열광적 지지를 보낸 게 아닌가? 그는 “라 꼬즈 드 푀플(La cause de people)'이란 자신의 신문을 거리에서 팔며 홍위병들에게 진한 연애편지를 써 갈겨댔다.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다. 한국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작가 이호철’은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의 절제감각이 좋았다. 선생의 명복을 빈다. 이산(離散)의 아픔으로 늘 괴로워하던 그 분이 저 세상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재회했기를 기원한다.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