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영 거북선호텔 지은 설종국(예성 토탈 건축사사무소)대표>

    10살 소년의 꿈, 40년만에 '거북선 호텔' 우뚝 

    통영 르네상스...'세계의 문화아이콘' 새꿈 꾸다

    인 보길 기자

    “여러나라 호텔에 다녀 봤지만 호텔 사장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느낀 건 처음입니다.“
    그를 만났을 때 이 말이 절로 나왔다. 이 느낌은 이 곳에 들어서면서부터였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뒤져 예약한 조그만 호텔, 첫 눈에 예사롭지 않은 외양부터가 그랬다.

  • ▲ 통영 거북선호텔과 통영운하에 걸린 통영대교의 석양.(통영 자료사진)
    ▲ 통영 거북선호텔과 통영운하에 걸린 통영대교의 석양.(통영 자료사진)

    ‘어? 주차장 아닌데...갤러리잖아.’ 분명 P자를 보고 들어왔는데 브레이크를 밟고 말았다.
    사방 벽에 커다란 액자들이 줄줄이 걸려 있어, 주차된 차가 없었다면 되돌아 나갈 뻔 했다.
    차를 세우고 둘러보니 옛날 통영을 그린 칼러-흑백 고지도들이다.

    큰 가방을 끌고 입구로 다가서자 유리문이 스르르 열린다.
    주차장과 프런트가 문턱도 없는 같은 방, 상냥한 여성 호텔리어가 맞는 그 곳엔
    더 큰 놀라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온갖 유물들을 진열한 대형 유리 박스들, 한쪽 벽을 차지한 옻칠 미술가의 옻칠 그림,
    대형 고지도, 통영이 낳은 문화인들의 한창때 사진들, 갖가지 전통 소품 등,
    한국에선 처음 보는 진짜 갤러리 프런트 룸이 풍기는 예술 냄새...
    “여기는 문화의 고장 통영이오” 두 팔 벌려 손님들의 넋을 빼앗는다.
    호텔이 아니라 수백년 전 조선시대 통영을 찾아 들어 온 느낌이다.

    그림이 걸린 엘리베이터를 내려 5층 방문을 열자 달려드는 푸른 바다!
    한쪽 벽 전체가 유리문, 시드니 하버 브리지를 닮은 통영대교와 아름다운 ‘해상 공원’이
    나그네의 놀란 가슴에 가득 안겨온다. 방은 또 왜 이리 넓고 아늑한지,
    베란다로 나서자 배들이 오가는 물길은 일제 때 생긴 ‘통영 운하’다.

    여기가 바로 이순신의 한산대첩 클라이막스--
    임진왜란 1592년 여름, 한산도에서 학익진을 펼친 충무공은 왜군 선단을 이곳으로 유인,
    거북선 두 척을 앞세워 수백척의 일본 해군을 불지르고 집중공격 격파해 버렸다.
    막다른 물목에 쫓긴 왜군들은 퇴로를 잃고 속수무책 전멸하다시피 했다.
    시체가 산더미로 길을 막아서 생겨 난 속칭은 ‘송장목’이다.
    그후 한국을 강탈한 일본이 1932년 운하를 뚫어 340년 묵은 패전의 한을 달래고자 했던 곳.
    그 위대한 역사의 흔적은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가.

    통영 거북선호텔--거북선이 세계적인 해전에서 세계적 대승을 거둔 그 자리에
    호텔은 대형 거북선 한척을 머리에 이고 격전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진작 섰어야할 기념물이 이제야 호텔로 탄생한 것이다.

  • ▲ 거북선호텔 프런트에 선 설종국 대표. 오른쪽에 박경리 김춘수 유치환등 통영출신 문화인들 사진들. 왼쪽엔 가장 오래된 통영 고지도.
    ▲ 거북선호텔 프런트에 선 설종국 대표. 오른쪽에 박경리 김춘수 유치환등 통영출신 문화인들 사진들. 왼쪽엔 가장 오래된 통영 고지도.

    설종국(53) 사장을 만나보고 싶었던 것은 사실 거북선 때문이 아니었다.
    거북선 지붕 아래 ‘Wine & Steak CRIMSON’에 앉아 사흘간 겪은 색다른 체험을 음미해본다.
    가족용 방에 정갈한 침대와 화장실, 공짜 아침 뷔페 역시 양념을 아끼지 않아 홀딱 반했다.
    통영의 역사와 문화를 곳곳에 전시하여 살아있는 통영 정체성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사람,
    ‘보이지 않는 서비스’가 더 따뜻한 공간들, ‘사돈 대접’ 받는 듯 풍성풍성 훈훈하고 정겹다.

    와인도 싼값에 이렇게 마실 수 있는 호텔이 서울에 있던가?
    뻣뻣한 특급호텔 하룻밤 방값으로 사흘을 즐기고도 여유로운 곳,
    본전 생각 않는 정신적 소통감, 여행을 편하게 의미 충만하게 채워주는 
    문화적인 손님 대접의 품격....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가야잖아?
    이런 호텔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니...신문에 소개라도 할까...
    안되지, 광고기사라고 오해 받기 십상인데...
    방값이라도 더 내고 가고 싶은 마음이 울어난다. 

    이때, 그가 나타났다. 성큼성큼 다가온 젊은 파커 차림이 큰 미소로 꾸벅 절을 한다.
    건네주는 명함엔 ‘예성 토탈 건축사 사무소’ 설종국 대표,
    이 호텔을 꿈꾸고 짓고 명품으로 만들어내는 50대 남자.
    예기치 않았던 즉석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 ▲ 옷칠 미술가 하정선 작품 '통영야상곡'
    ▲ 옷칠 미술가 하정선 작품 '통영야상곡'

    명함의 ‘예성’이란 이름풀이부터 들었다.
    예성을 한자로 안쓴다고, 한글 ‘예’는 ‘예술+예의’ 두가지 뜻,
    예술과 예의 모두 성공하고 싶어 스스로 선택한 작명이란다.

    --몹시 궁금했는데 이제 좀 짐작이 갑니다,
    첫날부터 이 호텔이 외모도 내면도 운영솜씨도 한덩어리 독특한 예술작품 같이
    느껴졌습니다. 예절과 예술이 어우러진 하모니...

    “작품이라니 감사합니다.” 낮은 목소리로 꺼내는 이야기들이 또한 자수성가 드라마다.

    “제가 어려서 어렵게 자랐는데요.
    한 살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4남매(1남3녀)를 키우시느라
    이것저것 안 해 본 것 없이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나중엔 비좁은 집에다 막걸리를 빚어 팔기 시작했는데.
    방이 없어서 방 많은 집이 부러웠지요.
    제가 대학 건축과를 지망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웃음).
    대학 나와서 <정림 건축>에 입사하여 첫 월급을 어머니께 드렸더니
    당장 막걸리 장사를 그만 두시더군요.
    서울서 8년쯤 근무하다가 라이선스(건축사 면허) 따자마자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통영을 위해서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싶었으니까요.“

  • ▲ 통영거북선호텔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통영자료사진)
    ▲ 통영거북선호텔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통영자료사진)

    --그 동안 좋은 일 많이 하셨던데요. 왜 하필 호텔을 좋은 일로 택하였는지.

    “그게 이렇습니다. 10살인가 초등학생 때였지요.
    잠잘 방이 없어서 쩔쩔 매던 시절, 손님이라도 오면 난감했지요.
    이웃에 여인숙이 있었는데 ‘해동 여인숙’ 이름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여인숙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저게 우리 집이었으면...(웃음)
    그 절박함이 꿈으로 변하고 고등학생 되니까 여관으로 변하고 호텔로 변하고...(웃음)“

    --축하합니다. 10살 소년의 꿈을 버리지 않고 40년 만에 이뤄내셨군요.
    그동안 건축사무소 일이 잘 되셨나 봅니다.

    “아닙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돈 운은 전혀 없고 사람 운이 좋았지요.”
    자나깨나 호텔 꿈을 지닌 채 94년부터 통영에서 일하던 그가 평소 찍어둔 땅이 있었다.
    통영대교를 오며가며 눈독 들인 이곳, 버려진 땅처럼 초라한 비탈이었다.
    어느 날 친분 있던 농협 상무를 만나 대화 하던중 그가 바로 땅 주인임을 알게 되자
    얼마나 놀랍고 반갑던지, 참 인복이 좋았다.
    땅 주인은 팔 수도 없는 땅이 이자만 먹는다며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두 말 없이 웃돈 조금 얹어 양도 받았을 때 ‘소년의 꿈’은 하늘을 날았다.
    때마침 누님에게 몫돈이 생겨 빌리고 빚도 얻고 관광진흥자금도 끌어다가 마침내 공사 개시.

    --거북선은 전국에 많습니다만,
    건물을 거북선으로 형상화한 까닭이 있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목포나 여수도 충무공의 전승지역이지요.
    하지만 통영 한산대첩이 임진전쟁의 판세를 뒤집은 결정판이므로
    ‘통영 거북선’을 통영의 상징으로 만들자고 작정한 겁니다.
    특히 호텔은 국내외 많은 사람들이 오시므로
    ‘통영만의 거북선, 통영만의 문화예술’을 알리는데
    아주 적합한 장소 아닙니까.” 

    건축 예술가의 꿈은 ‘통영 문화 르네상스’로 창조의 나래를 활짝 폈다.
    이미 지어놨던 이름도 ‘통영거북선호텔’로, 건물 전면은 거북등 문양,
    지붕은 아예 거북선 한척, 내부엔 ‘통영문화’의 모든 것을 보여주려 노력하였다.

  • ▲ 통영거북선호텔에 전시된 유명한 사진. 1950년대 통영 르네상스 운동을 벌인 통영출신 문화예술인들. 김상옥 김용주 김춘수 유치환 전혁림 정윤주 등등. 이중섭 화가도 이무렵 통영에 왕래했다고 한다.
    ▲ 통영거북선호텔에 전시된 유명한 사진. 1950년대 통영 르네상스 운동을 벌인 통영출신 문화예술인들. 김상옥 김용주 김춘수 유치환 전혁림 정윤주 등등. 이중섭 화가도 이무렵 통영에 왕래했다고 한다.

    통영이 낳은 문인들 박경리 김춘수 유치환등 작품집들을 곳곳에 비치 열람시키고,
    하정선 작가의 대형 옻칠화 ‘통영야상곡’, 진남비연보존회에서 복원한 통영 연 30종을 선보인
    ‘통영전통연의 비상’ 전시는 물론, 객실번호판도 나전장 김종량 장인의 솜씨,
    여기에 통영바다를 디자인한 가구들, 통영 손누비 쿠션과 티슈케이스,
    통영 동백으로 만든 샴푸와 에어컨디셔너까지 소품 하나 하나에 그의 집념이 묻어난다.
    출판사 ‘남해의 봄날’ 정은영 디자이너와 함께 해왔다.
    진주시내 ‘인사동 골목’에 골동품이 나오면 설 사장에게 먼저 연락한다고.
    통영 냄새만 나도 무조건 사들인다.

  • ▲ 뉴욕 경매 사이트에서 카드로 구입한 통영 고지도.
    ▲ 뉴욕 경매 사이트에서 카드로 구입한 통영 고지도.


    --주차장이 옛날 지도 전시장인데, 가장 오래된 통영지도까지 구입하셨더군요.

    “네, 작년 1월에 우연히 신문에서 기사를 봤지요.
    미국 경매장에 통영지도가 나왔으니 한국이 사야되지 않겠느냐고.
    한국이 안사면 다른 나라로 가게 생겼어요. 정부가 빨리 사야할 텐데
    그걸 기다릴 수 없으니 내가 사야겠다 순간 결심하였습니다.
    뉴욕 경매 사이트에 연락하고 ‘카드도 되느냐’ 물었더니 오케이 (웃음),
    할부로 하려다가 불안해서 일시불로 1만5천 달러, 한화 1천620만원,
    16억도 아니고 (웃음) 참 뿌듯했습니다.”

    해외 택배를 통해 지도를 받던 날, 그는 차마 뜯어볼 수 없었다.
    대학 합격자 발표 순간 같은 기분, 보물에 손대는 듯 설레임에
    차에 넣어두고 망설이다가 밤 12시쯤 아내에게 물었다.
    '뜯어 볼까?' 아내가 동의하자 ‘모셔 와서’ 조심조심 뜯어 펼쳤을 때 그 경이로움.
    1827~1850년쯤 제작한 지도는 통제영(統制營) 세병관등 건물 이름들,
    주변 교통망과 이웃 고을들, 한려수도 섬들, 옛 지명이 선명하게 표기된 천연색 동양화...
    지도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 한동안 말을 잃었다고 한다.
    그는 그동안 수집한 통영 고지도들과 함께 전시회를 개최한 뒤, 
    프런트에 걸어놓고 복사본을 만들어 통영선전용 선물로 돌리고 있다.

  • ▲ '통영길 문화연대' 동지들. 뒷줄 가운데 설종국 대표.
    ▲ '통영길 문화연대' 동지들. 뒷줄 가운데 설종국 대표.

    --고향이라지만 통영 사랑이 대단합니다.
    호텔 전체에 한국인의 프라이드가 넘쳐 보입니다.
    대형호텔들도 국적불명 복사물 정도인데 이곳은 모두 ‘통영인’의 진품들이라 훌륭합니다.
    방 42개짜리 호텔 사방에 시가 흘러요. 구석구석 예술의 속삭임, 넉넉한 인간 냄새,
    체격은 작아도 영혼은 광활한 호텔, 젊은 열정과 진정성이 저 바다 같습니다.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가장 통영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웃음)...
    이런 신념으로 내일의 통영을 위하여 젊은 세대의 문화활동을 지원하려 노력중입니다.”
    그가 가리키는 벽에는 예쁜 전자미술품이 빛을 뿜는다. 30대 장정호 작가의 미디어아트 작품,
    통영 청년작가회 이진숙 강동석 그림도 구입하여 객실에 걸었다.
    꼭대기 전망 좋은 거북선 몸통 속은 세미나실, 젊은 문화 토론이 이어지고
    전시실도 물론 개방하여 젊은 전시, 젊은 공연들이 열리고 있다.
    학생시절부터 독서회 활동에 참여한 그는 고향에 정착하자 환경보존운동에 앞장섰다.
    통영을 통영으로, 천혜의 통영 자연은 하느님도 손댈 수 없는 국보라 믿었다.
    달동네 동피랑 재개발을 막아 지금은 ‘벽화 마을‘ 관광명소로 변하였고,
    ‘통영길 문화연대’를 만들어 동지들과 통영성을 비롯한 골목골목을 누비며,
    어느 도시보다 옛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통영을 한국문화도시의 아이콘으로
    세계에 높이 뜨는 날을 향해 차근차근 걸어가고 있다.

    --언젠가 그 꿈도 꼭 완성시키기 바랍니다.
    그동안 정말 ‘손님 대접’ 같은 대접을 잘 받고 갑니다.
    세계 속의 통영을 위하여 축배를...

    “운전해야 하는 데요” 그는 밤 늦게라도 ‘흙집’으로 가야한다며 일어섰다.
    16년전 친구 집 지을때 미륵산 너머 산양 바닷가에 지은 흙집은
    원적외선 덕분에 마음의 평화와 단꿈을 주는 '통영 설계사'의 아지트,
    나전칠기를 연구하는 부인 지미향씨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일, 5년 넘게 하루도 거르지 않은 일이 있다.
    날이 새면 부부는 ‘이순신 공원’으로 달려가 동트는 하늘에 우뚝 서있는 그분,
    충무공 동상 앞에 새벽참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 ▲ 레스토랑 '크림슨' 벽에 반짝이는 미디어 아트 앞에서.
    ▲ 레스토랑 '크림슨' 벽에 반짝이는 미디어 아트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