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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6월 金泳三의 北爆 반대,
    한국은 기회를 놓쳤다!

    유리한 高地에 섰을 때 공격을 하지 않으면 불리한 처지에서 수비를 해야 한다.
    지금 한국은 핵무기가 없고, 북한은 핵미사일을 갖고 있다.
    1994년의 기회를 놓친 代價(대가)이다.

    조갑제, 김필재    
       
       아래는 1994년 6월 北核 위기 때 金泳三 당시 대통령이 무엇을 했는가를 본인이 스스로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는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 시설을 폭격하려고 하는 것을 막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좀 과장된 표현이다.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對北제재의 여러 방법 중 하나로 영변 폭격을 검토하고 있었지 확정된 계획은 아니었다.

       김영삼은 퇴임 후 그때 폭격을 하였더라면 북한의 반격으로 全面戰(전면전)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썼다. 이 또한 검증되지 않는 추론이다. 당시 북한은 핵무기가 없었다.
    중국도 지금처럼 강력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옐친은 지금의 푸틴보다 親서방적이었다.
    북한은 폭격을 당하고 가만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반격을 했다고 하더라도 局地的(국지적)이었을 것이고 全面戰은 무리였다. 핵무기도 없고, 고립된 상태에서 멸망으로 갈 것이 뻔한 전면전을 일으켰을까?

       오히려 김영삼 대통령은 北爆(북폭)을 망설이는 클린턴 행정부를 압박하여 핵개발의 禍根(화근)을 도려냈어야 옳았지 않았을까? 이렇게 말할 수 없었나?
       "핵무장한 북한과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한국에 배치되었던 미군 전술 핵무기까지 나가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핵폭탄을 가진 깡패 앞에서 벌거벗은 채 있을 수는 없습니다. 북한의 핵시설을 폭격하면 그들이 도발할지 모르지만 韓美동맹으로 대응하면 됩니다. 다소간 피해가 있다고 해도 미친 집단이 핵무기를 손에 넣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우리 같이 합시다."
      
       유리한 高地에 섰을 때 공격을 하지 않으면 불리한 처지에서 수비를 해야 한다. 지금 한국은 핵무기가 없고, 북한은 핵미사일을 갖고 있다. 1994년의 기회를 놓친 代價(대가)이다. 

  • ▲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방한했을때 김영삼 대통령이 선물할 '대도무문' 을 쓰고 있다.(청와대. 1993.7)
    ▲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방한했을때 김영삼 대통령이 선물할 '대도무문' 을 쓰고 있다.(청와대. 1993.7)


       <내가 러시아에 머물고 있는 순간에도 북한 핵 문제는 긴박한 대치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6월3일 오후 7시15분 크렘린宮 내 영빈관에 머물고 있던 나에게 로마를 방문중이던 클린턴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왔다. IAEA(국제원자력기구)가 막 북한과의 핵 협상 실패를 선언한 직후였다. 한스 블릭스 IAEA 사무총장은 3일 유엔안보리에 출석해 『연료봉 교체에 대한 사찰 실패로 북한의 과거 핵 물질 전용 여부에 대한 검증이 불가능해졌다』면서 국제사회의 강력한 조치를 요구했다.
    金日成은 이에 대해 『완전히 벌거벗느니 전쟁을 택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와 클린턴 대통령은 35분간의 전화 통화를 통해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대응 방안을 협의했고, 현시점에서는 북한에 대한 유엔 제재 결의안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나에게 6일쯤 안보리에 對北 제재 결의안을 상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바야흐로 對北 제재 일정에 가속이 붙고 있었다. 나는 클린턴에게 북한 핵문제가 대화로 풀리지 않은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한 뒤 『한국 정부는 이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관계국들과 긴밀히 협조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날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게도 전화를 걸어 북한 핵문제를 유엔 안보리에서 다룰 수밖에 없게 됐다는 입장을 전달하고 협력을 요청했다.
       북한은 IAEA와 협상을 결렬시킨 직후 『현재의 핵개발 계획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진척시킬 것』이라고 위협하며 미국과의 협상을 요구하는 등 시간을 끌어보려 했다. 하지만 클린턴 행정부는 미·북 3단계 고위급 회담을 취소하는 등 對北제재가 불가피하다는 방향으로 급선회하고 있었다.
      
       한반도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의 일이다. 6월16일 오전 안보수석으로부터 내게 이런 보고가 올라왔다. 『레이니 駐韓(주한)대사가 내일 기자회견을 합니다』
       그 내용인즉 「회견 직후 주한 미군 가족과 민간인 및 대사관 가족을 서울에서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미군 가족이나 대사관 직원들을 철수하는 것은 미국이 전쟁 일보 직전에 취하는 조치였다. 미국은 유엔 제재와 별도로 北爆(북폭)을 감행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레이니 대사도 딸과 손자·손녀에게도 한국을 떠나라고 지시해 두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 유사시 寧邊(영변)을 폭격할 계획을 세워놓았다는 것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 항공모함과 순양함이 北爆에 대비해 동해안으로 접근해 있었다.
       寧邊과 平壤(평양)은 대대적인 미군 폭격기의 空襲(공습)과 함포사격의 사정권 안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미군의 폭격이 이뤄질 경우 그 즉시 북한은 휴전선 가까이 전진배치되어 있는 엄청난 규모의 화력을 남한을 향해 쏟아 부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가능성을 폭격으로 저지할 수 있겠지만 可恐(가공)할 인명 살상의 참화가 한반도를 초토화시킬 것이었다. 유엔을 통한 국제사회의 제재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민족의 共滅(공멸)을 가져올 「선제 북폭」(北爆)을 감행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北核 제재의 이유는 핵 위협을 제거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한·미 양국軍이 비상경계에 들어간 것도 어디까지나 好戰的(호전적)인 북한 정권에 대한 억지력을 확보하려는 것이었을 뿐 한반도에서의 戰爭(전쟁)을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16일 오후 나는 비밀리에 집무실로 레이니 주한미국대사를 불러 단독으로 1시간 동안 요담했다. 레이니 대사는 나와 오랜 친구였으며, 클린턴 대통령이 외교관이 아닌 레이니를 주한대사로 임명한 이유도 나와 문민정부에 대한 미국의 友好(우호)를 표시하기 위한 뜻이었다.
       하지만 민족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앞에 두고 나는 레이니 대사에게 강력하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레이니 대사, 당신은 나와 오랜 친구가 아니오.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면 그 즉시 우리 남한도 북한의 포격에 의해 초토화됩니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있는 한 전쟁은 절대 안 되고 가족 등 미국인들의 소개도 안 됩니다. 지금 바로 클린턴 대통령에게 연락해 내 이야기를 분명히 전하세요. 나는 한국군의 통수권자로서 우리 군인 60만 중에 절대 한 사람도 동원하지 않을 겁니다. 미국이 우리 땅을 빌려서 전쟁을 할 수는 없어요.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내가 레이니 대사를 비밀리에 청와대로 부른 것은 너무나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재임중 외국 대사와 단 둘이 따로 만난 것은 이날 레이니 대사를 만난 것과 황장엽 망명 당시 강택민 주석에게 내 뜻을 전달토록 하기 위해 張庭延(장정연) 중국대사를 만났을 때, 단 두 번뿐이었다.
       레이니 대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사관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외교안보수석이 『미국 대사가 회견을 일단 연기했습니다』하고 보고해 왔다. 레이니 대사가 나와 만난 직후 직접 백악관의 클린턴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다는 보고였다. 나는 일단 숨을 돌렸다. 그날 새벽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거세게 몰아붙였다.
       『클린턴 대통령, 이게 말이 됩니까.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이상 우리 60만 군대는 한 명도 못 움직입니다.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드는 것은 절대 안 됩니다. 전쟁이 나면 남북에서 군인과 민간인이 수없이 죽고 경제는 완전히 파탄 나며 외국자본도 다 빠져나가게 돼요. 당신들이야 비행기로 공습하면 되지만, 그 즉시 북한은 휴전선에서 남한의 주요 도시를 일제히 포격할 겁니다. 우리가 6·25 때 수없이 죽었는데 지금은 무기도 훨씬 강력해졌어요.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나는 우리 역사와 국민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소』
       한·미 정상간 핫라인을 설치하면서 『24시간 어느 때라도 서로 원하면 통화할 것』을 약속했지만 전화를 걸어온 클린턴 대통령은 내가 잠들어 있을 새벽에 전화하는 것이 미안했는지『내 평생의 즐거움이 김영삼 대통령 각하의 목소리를 듣는 겁니다』라며 인사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그 즈음은 내 재임 중 가장 고뇌했던 한 시기였다. 미국이 아니더라도 유엔 제재가 본격화되면 북한이 언제 남한을 선제 공격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북한의 핵개발을 봉쇄하면서 동시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절대 막아야 했다. 나의 강력한 추궁에 클린턴 대통령은 억지로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끝냈다.
      
       6월17일 카터 前 대통령은 金日成과 평양의 대동강 요트선상에서 2차 회담을 갖고 CNN과 회견했다. 카터 대통령은 김일성에게 미국이 對北 제재 중단, 3단계 북·미회담 재개, 경수로 제공 등의 의사가 있음을 밝혔고, 김일성은 NPT복귀를 비롯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는 보도였다.
       백악관은 일단 對北 제재의 중단이 미국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밝혔고 아직은 북한의 眞意(진의)를 속단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로부터 전쟁위기로까지 치달아 가던 위급한 상황은 간신히 한 고비를 넘어가는 듯했다.
       나는 6월18일 판문점을 거쳐 서울에 온 카터 대통령 내외와 청와대에서 부부동반으로 오찬 겸 회담을 했다. 카터 대통령은 뜻밖에도 金日成의 제안을 가지고 왔다.
       『김일성 주석이 김영삼 대통령께 언제 어디서든 조건없이 만나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김일성이 남북 정상회담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카터 대통령은 대동강에서 자신과 로잘린 여사, 그리고 김일성과 부인 김성애가 뱃놀이를 하는 도중, 자신이 김일성에게 『위기를 극복하려면 남한의 김영삼 대통령과 반드시 만나셔야 합니다. 두 분이 만나시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더니 김일성이 그 자리에서 『좋습니다. 기꺼이 만나겠습니다』하고 흔쾌히 승낙을 하더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러면 김영삼 대통령하고 내가 내일 청와대에서 오찬을 하기로 돼 있는데 그때 전달해도 되겠습니까』하고 했더니 역시 좋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카터 대통령의 설명을 들은 즉시 남북 정상회담 제의를 수락했다. 나는 카터 대통령이 가지고 온 김일성 주석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런 제의였지만 남북 정상이 직접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북한 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진전, 그리고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익한 계기가 될 수 있을 터였다.
       혹시라도 김일성의 제의가 단순한 선전용 발언이었다고 한다면 그러한 거짓말은 곧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한은 중국이나 러시아의 암묵적 지원을 얻는 것조차 불가능해지는 등 국제사회에서 회복불능의 상태로까지 빠져들 것이었다.>
      
       미국의 전쟁 준비 秘話 (김필재 정리)
      
       1994년 6월 클린턴 대통령은 민감하고 중대한 위기를 초래할지 모르는 외교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미국은 1993년 3월12일 일방적으로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통고한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또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이 독단적인 공산정권의 핵무기 개발 의도를 저지하기 위해 1년 가까이 협상을 벌여오고 있었다.
       1994년 5월, 중단을 거듭하며 이어져 왔던 북한과의 협상이 갑자기 결렬될 기미를 보였고, 그해 6월13일 북한은 결국 IAEA(국제원자력기구)를 탈퇴함으로써 북핵 사태는 최악의 상황을 연출하게 됐다. 미국의 협상단과 국제적인 확산금지 운동을 비웃기라도 하듯 북한은 5MWe(메가와트) 원자로의 노심(爐心)을 드러내고 핵무기 5개를 제조하기에 충분한 플루토늄을 연료봉에서 추출한 것이다.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은 당시 미 국방장관이던 윌리엄 페리의 책 ‘Preventive Defense: A New Security Strategy for America (Brookings Institution Press, 1999)’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나는 살리카시빌리 합참의장과 주한미군 사령관 게리 럭 장군에게 ‘작전계획 5027’(전면전 대비계획)을 점검할 것을 지시했고, 북한 핵시설 제거를 위한 비상계획을 재점검하도록 지시했다. 우리는 비상계획을 통해 북한 핵시설을 파괴할 수 있지만, 문제는 북한의 對南 보복 가능성이었다...(중략) 1994년 6월14일 나는 군 수뇌부 회의를 소집했는데 이 자리에서 게리 럭(Gary E. Luck) 주한미군 사령관은 작전계획 5027 실행방안에 대해 상세히 보고했다. 나는 대량살상무기 사용이 포함될 수 있는 전쟁이 일어날 직전에 와 있음을 직감했다.>
      
       당시 미국의 입장은 분명했다. 만약 북한이 핵무기를 이미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시아에서 핵무기 개발 경쟁을 유발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핵무장을 한 북한이 이란이나 이라크와 같은 ‘깡패국가’(rogue state)나 테러조직에게 무기를 수출할 우려도 만만치 않았다. 전쟁 위협은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기는 했으나, 미국으로서는 북한 핵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쟁에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월 중순 미 행정부 관리들은 1만 명의 미군을 한국에 증파하는 계획을 은밀히 추진했고, 전쟁에 대비해 미국이 취해야 할 제1단계 조치들에 대한 계획도 확정했다. 한편,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는 호전적인 언사가 난무했으며 등화관제가 실시됐다. 물론 대다수 해외 관측통들은 한국전쟁의 재발 가능성을 매우 희박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거의 마비 상태에 빠져버린 협상을 오랫동안 이끌어 온 미국 관리들은 군사적 충돌 없이 핵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당시 미국 朝野(조야)는 강경론으로 들끓었다. 6월 중순 실시된 타임/CNN의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과반수에 가까운 47 퍼센트가 북한의 핵 시설에 대한 유엔의 군사행동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군사행동을 반대하는 여론은 40 퍼센트였다. 특히 6월15일자 워싱턴 포스트지의 칼럼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Brent Scowcroft, 전 국가안보보좌관)와 아놀드 캔터(Arnold Kanter, 전 국무부차관)는 공동기고문에서 “북한이 IAEA의 전면적인 사찰을 허용하지 않을 경우, 미국은 북한의 재처리 시설들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에 대한 생각은 이미 정계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6월16일 미 상원은 “북한으로부터의 공격을 저지하고, 만약 필요하다면 격퇴시키기 위해 모든 필요한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는 존 맥케인(John McCain) 상원의원의 수정안을 승인하기도 했다. 펜타곤(Pentagon)은 對北제재 방안을 강구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전쟁을 마지막 대안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토머스 플래너건(Thomas Flanagan) 대령은 당시 펜타곤의 분위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군부는 전쟁의 결과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죽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 국민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막의 폭풍’작전은 미국인들의 마음에 허황된 인상을 심어줬다. 이것은 우리가 깨끗한 전쟁, 즉 미국인들은 죽지 않는 전쟁을 치를 수 있다는 망상이었다.”
       한편, 전쟁을 치르는데 소요되는 경비와 인명 피해의 윤곽을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여주기 위해 합동 참모본부는 1994년 5월 말 이미 모든 지역 사령관과 4성 장군들을 워싱턴으로 소집해 한반도 문제를 토의했다.
       게리 럭 장군의 추산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군은 8만에서 10만 명이 사망하고 한국군은 수십만이 사망할 것이라고 밝혔다. 더구나 플래너건 대령은 서울이 공격 받으면 “민간인들의 희생 역시 엄청날 것”이라고 밝혔다. 경비면에서 보더라도 제2의 한국전쟁은 걸프전에 소요된 600억 달러를 훨씬 넘어 1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럭 장군은 추산했다.
      
       워싱턴에서 전쟁 결과에 대한 얘기가 나돌자 그레그 전 대사는 서울은 고도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으며 불안감이 피부로 느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 증시는 이틀 만에 25퍼센트나 떨어졌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이미 도착했고 다른 무기들도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당시 병력 이동에 대비해 모든 시스템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군부에서도 정말로 전쟁이 임박했다고 믿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1994년 6월16일,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對北제재에 대비해 한반도에 군사력을 강화하는 조치를 승인하기 위한 안보회의를 소집했으며, 펜타곤은 對北 제재 강도에 따른 세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그 중 펜타곤이 선호한 대안은 병참 부문을 담당할 2만 3000명의 병력을 우선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주한 미군사령관이었던 게리 럭 장군이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한 40만 병력의 선발대 격이었다. 두 번째 대안은 추가로 전투기를 포함해 30~40대의 항공기를 한국에 급파하고 괌(Guam)에는 영변 핵 시설에 대한 초정밀 폭격을 위해 F-117 스텔스 전폭기를 배치한다는 내용이었다. 세 번째 대안은 한반도 지역에 항모를 배치하고 육군과 해병대를 파견한다는 내용이었다.
       갈루치(Robert Gallucci) 전 미국무부 차관보는 이날 일을 이렇게 회고 했다.
       “당시 우리는 동북아시아에서의 미군 병력을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증강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대통령은 허세를 부린 것이 아니다.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갈루치와 주변에서는 미국의 추가 병력 투입이 북한을 벼랑 끝으로 몰지나 않을까 우려했으나 전쟁을 피하기 위한 더 나은 대안이 없어 보였다.
      
       한편, 당시 클린턴의 정책을 공공연하게 비판해왔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6월초 클린턴에게 전화를 걸어 북한이 분쟁 조절을 위해 평양에서 자신을 초청했다고 말했다. 이때 미 행정부 관리들의 반응은 막연한 희망에서부터 공포에 찬 경악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6월5일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는 카터를 달래려고 애틀란타로 날아가 당시 상황을 브리핑했으며 이는 카터의 방북 의지를 더 굳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클린턴은 선택의 여지가 점점 좁아져 감에 따라 카터가 정부 대표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다는 조건을 명백히 한 뒤 訪北을 허락했다. 이에 카터는 6월13일 서울을 거쳐 15일 평양에 들어갔다.
       카터는 김영남 북한 외교부장으로부터 “IAEA 사찰단이 곧 축출될 것이며, 3단계 고위급 회담이 재개돼 협상이 타결되기 전에는 다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북한 측은 카터를 좋아했다. 전직 대통령이란 그의 지위 때문이기도 했지만 카터는 1976년 대선 유세 때 주한 미군 철수를 약속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그런 카터를 이용했던 것이다.
       카터는 북한 측의 강경자세에 실망하고 놀란 나머지 다음날 새벽 3시 보좌관 마리온 크릭모어(Marion V. Creekmore 전직 대사)를 판문점으로 보내 워싱턴에서 연락이 오면 회담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클린턴에게 전하도록 준비시켰으나 그 소식은 미국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날 아침 김일성이 뜻밖의 제안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날(16일) 북한의 핵 개발 프로그램을 ‘동결’해야 한다는 카터의 주장에 김일성은 잠정적으로 핵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겠으며, 미국이 경수로 공급을 약속하면 항구적인 동결도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이 내용이 카터와 동행한 CNN 취재팀을 통해 全세계로 송출됐다. 이 같은 김일성의 제의는 워싱턴 관리들을 놀라게 했다. 같은 시간 미 행정부는 한국에 1만 명의 추가 병력을 투입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워싱턴 시간으로 16일 오전 10시30분경, 안보회의가 열리고 있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카터를 무시하고 제재 조치를 계속 밀고 나가자고 제의했으나, 클린턴은 김일성의 요구를 받아들여 “오늘의 진전이 북한이 진정으로 핵개발을 동결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고위급 회담 재개에 동의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군사충돌의 위기는 피할 수 있게 되었다.
      
       1994년 6월 북한 핵 사태로 인해 한반도에 戰雲이 감돌고 있을 무렵 한국 정부는 정치적 부담이 큰 스캔들로 상당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대선 정치 자금 수수 문제로 인해 곤혹을 치루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국정조사가 진행 중이었다. 여기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의 병력 증강을 통보받은 레이니 대사는 청와대로 가서 주한 미국인을 소개(疎開) 시켜야겠다고 통보했다. 그제서야 한국 정부는 미국이 전쟁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우왕좌왕 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미 양국은 겉으론 빈틈없는 공조체제를 외치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심각한 균열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1994년 2월14일 공개된 美 의회 조사국(CRS)의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북핵문제에 대한 한미 간 접근 방식의 차이가 미국의 對북한 핵 정책 수립에 큰 부담이 된다고 보고 있었다. 즉 김영삼 정부가 북한 핵에 대한 단기적 영향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접근함으로써 全세계적 핵 확산 방지 차원에서 파악해 온 미국과 다른 시각을 보여 왔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그들의 대외정책에 대해 공동보조로 나아가야 할 한국이 중요한 시점에서 이견을 보일 때마다 당혹해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동맹보다도 민족이 앞선다”고 발언했다가 그 뒤에는 “핵을 가진 자와는 대화를 할 수 없다”고 발언함으로써 對北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러다가도 미국이 북한에 강하게 나가면 전쟁이 난다고 매달려 말리고 유화적으로 나가면 북한에 휘둘린다고 미국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관성 없는 한국 정부의 對北정책은 결국 동맹국인 미국으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의 死活이 걸린 북한 핵 문제를 미국과 북한이 결정하는 문제로 만들었으며 자주성과 주도권을 상실, 미북 제네바 협상 全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다.
       (조갑제닷컴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