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무성 대표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 달라.”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은 29일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이같이 요청했다.
우스갯소리로 던진 말이지만 냉랭한 기운이 오가는 당청사이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뼈있는 농담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 말을 듣고 ‘파안대소(破顔大笑)’한 것으로 전해졌다.박 대통령은 이날 13개월 만에 국회에서 여야 지도부와 회동했지만 마주한 표정만 봐서는 누가 여당이고 야당인 지 구분이 안설 정도 묘한 기운이 돌았다.
발단은 지난 1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개헌 봇물’ 발언을 한 뒤 곧이어 공무원연금 개혁안 연내 처리 불가능이란 입장을 내놨다. 앞서 박 대통령은 현 시점의 개헌 논의는 ‘경제 블랙홀’이라고 규정했고 또 당정청 회동에 김기춘 비서실장까지 보내 공무원연금 개혁안의 연내 처리를 적극 당부한 바 있다.
김 대표는 뒤늦게 개헌 발언을 사과하고 또 공무원연금 개혁안을 새누리당 소속 의원 전원의 명의로 발의하는 등 때늦은 ‘충성심’을 강조하고 있지만 박 대통령의 서운함은 현재진행형으로 보인다.
-
먼저 박 대통령은 이날 국회 시정연설을 마무리 짓고 본회의장을 나서면서 의원들과 반갑게 악수를 나누다 김 대표와 마주쳤지만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고 악수만 하고 지나갔다. 또 여야 지도부와 회동 때는 김 대표가 “야당 지도부와 만나 대화하는 기회를 자주 가져달라”고 요청했지만 박 대통령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이러한 태도는 김 대표에게 감정이 상한 것보다 앞으로 남은 3년여의 임기를 이끌어나가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여진다.
새누리당이 김무성 대표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면서 핵심 현안마다 연달아 청와대와 각을 세우는 등 대통령의 레임덕을 독촉하는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
최근 친박 내에서 최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이름이 자꾸 거론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연달아 자기 정치를 시도하는 김 대표에 대항할 상대로 반 총장을 띄우는 한편 친박을 결집시키는 효과도 있다. 현재 새누리당 내 거론되는 차기 주자들이 대부분 비박계라는 점에서 당을 추스르기 위한 또 하나의 장치라는 것이다.박 대통령은 여당의 독자행보를 차단하기 위해 야당과는 새로운 관계정립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 28일에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를 청와대에 초청한 데 이어 이날은 신임 야당 지도부와 회동을 가졌다.
박 대통령은 ‘야당의 힘’을 아는 정치인이다. 지난 2012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뒤 첫 일정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했다.
또한 DJ 측근인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와 김경재 전 의원,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의 지지선언을 이끌어 낸 것은 그의 대선 승리의 주요 발판이 됐다.
한편 이날 박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의 회담 직전 김무성 대표는 좌석 배치를 바꿨다. 대통령 기준으로 왼쪽이 야당, 오른쪽이 여당이었으나 그의 제안으로 대통령의 오른쪽에 야당이 앉게 됐다.
회동이 시작되자 문희상 비대위원장은 “국회 잘 오셨습니다. 오늘은 저쪽(여당)은 좌편이고 이쪽(야당)은 우편”이라고 했다. 이날만큼은 여당과 야당이 뒤엎어졌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