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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北 수교 급피치...통일-북핵 물건너 간다!

시진핑 만난 박근혜, 100년전 일본 편든 미국의 죄악 활용외교 펼쳐야

허문도 전 통일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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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07-03 09:38 수정 2014-09-15 14:09


         한국의 통일을 싫어하는 나라
일본

허문도 /전 통일부 장관

▲ 허문도 전 통일부 장관이 이승만 포럼에서 강연하는 모습..

일본은 지금 북과 수교하려 하고 있다.
신문 등 한국의 눈들은, 5월말의 북·일 스톡홀름합의가 일본의 납치자 문제에 무게를 두고 발표한 것에 끌려들어, 일본과 북이 정작 노리는 수교문제의중대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북핵·미사일 문제로, 그동안일본이 취해왔던, 제재조치를 풀겠다니까,
이것이 북핵의 국제제재망에구멍을 내지 않을까, 그 잠재적 가능성을 걱정하는 정도이다.
  
그나마우리 외교력은 일본이 현하의 동북아 상황에서,
초점을 피하려 차폐막처럼 흔드는 것으로 보이는 위안부문제에 쏠려있는 느낌이다.

역사의 짐을 털지못하는 일본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통일된 한국의 강력한 민족주의라 하고있다. 이 같은 시각은 미국의학자한테도 있어서, 통일한국의 민족주의는 일본을 향해 가공할
도전이기를 넘어 위협이기 까지 할 것이라하고 있다.
(Samuel K. Kim, Korea at the Center, M.E.Sharpe, p.178)
  
이교수는 결론적으로, 그래서 일본의 국가 전략가들은, 일본을위한 최상의 방책은 가능한 한 장기에 걸쳐 (반도 분단의) 현상을유지하는 것으로, 조용하게 진작부터 결정해 놓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즉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게 하는 것이 일본의 국가전략이라는 말이다.

일본이 내걸고 있는 한반도 평화유지정책이 바로 이것이다.

일본이 한국의 통일을 싫어한다는 것은 미국의 키신져도 진작 지적해보였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스스로의 영향력 유지를 추구한다. 일본은 통일한국이 결국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더욱 고집스런 경쟁자가 되겠기에 한국의 통일을 혐기(嫌忌)한다. 일본은 조총련의대북송금을 허용하여 북한의 경제적 연명을 돕기도 했다.(Does America Need a Foreign Policy?, 2001)

냉전시대는 일본이 힘들이지 않고도 분단 정책은 유지되었다.
냉전이 끝나 공산국가들이 위태로워지자 일본은 즉각 움직였다.
정부간대화는 시간이 걸리니까, 비상수단을 썼다. 일본은 집권 자민당과북과의 대화창구였던
사회당의 합동대표단을 급조하여 평양으로 보내, 김일성과 회담하고는 바로 북일수교선언문을
채택했던 것이다. 1990 9월이었다. 다음해 1월부터 시작된 북·일교섭은, 그 무렵 인공위성에 포착된 북의 핵개발 의혹으로 미국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지난 5월 말의 스톡홀름합의로 드러난 북일수교 움직임은, 2002년의 평양선언을 받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때는 북이 300만 아사 다음으로 경제가 완전히 파탄나 있었다.
북을 경제로 떠받쳐야 남북분단의 현상이 유지될 것이라고 일본은 본 것이다.

▲ 2002년 평양을 방문, 김정일과 악수하는 고이즈미 수상.

고이즈미(小泉) 일본수상이  북으로 가서 김정일과 만나 만들어낸 평양선언의핵심은,
수교의 의지와 원칙을 밝히고 있다.

이때에 일본이 평양측에 해보인 약속은 북한경제가 산업화 달성이 가능토록 경제원조를지속적으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말이 나오기로는 수교와 동시에 일본돈 100억달러가 우선 북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이정도의 돈이면 반도분단의 고착과 영구화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때의 수교교섭은 일본의 납북자문제에 착오가 일어나고, 미국이 이번엔 농축우라늄 문제로 제동을 걸어, 돈좌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이후 일본은 6자회담을 통과하고, 북핵제재 서클에 들면서도 평양선언이 살아있다는 소리를 빠트리지 않았다.

우리는 한반도 분단고착 전략의 원조(元祖)를 아베 수상의 외조부이자, 한국에 곧잘 친한파로 알려진 키시() 수상에게서 찾고자 한다.
북송을 뜯어 보면 키시와 전체 일본인이 전체 한국인과 반도를 식민지 지배의 연장선상에서
분리·지배(divide and rule)해 보겠다는 전략감각의 소유자임을 알게한다.

▲ 1960년대 재일동포를 싣고 북한으로 떠나는 만경봉호.

 북송 납치냐 추방이냐.

서울에 유학도 했던 요미우리() 신문기자 기쿠치 요시아끼(菊池嘉晃)의 『북조선귀국사업』(中公新書)은 북송의 전과정과 그이후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책의 부제가 눈을 끈다.「장대한 납치」인가, 「추방」인가가 그 부제이다

북송은재일동포에 대한 김일성 체제의 「장대한 납치」아닌가. 혹은 일본정부가 그들이 공공연히 「골칫덩이」로여긴 재일한국인(이승만 대통령이 전체 재일동포를 이렇게 불렀다.)을공산치하로 「추방」해 버린 것 아닌가 하고 붇고 있다. 그러나 이 저자는 백퍼센트 그렇다고 답하지는않고, 북송된 자들의 자발성을 상당부분 인정한다. 그런 저자기쿠치(菊池)는 북송된 교포들이 북한당국의 조종을 받는 조총련이 일본매스콤의 가세까지 얻어서 벌린 북은「지상낙원」이라는 선전에 낚여서 북송선을 타게 됐고, 도착하자 마자 이들을 기다린 것은 열악한 생활환경에다
감시, 차별까지 곁들인 생지옥이었슴을 가감없이 알려주고 있다.

50년대 말 그때 한편에서 수교를 위한한일회담이 진행중인데, 일본정부는 일본적십자를 통해 국제적십자의 협력을 확보하자 높은 여론의 지지를업고, 북송사업 실시를 결단하고 나왔다. 1959 1월말이었다. 평화선(일명·이승만라인)을 넘는 일본어선을 나포하고 있던 한국측은
북송선이 어느 나라 배든지 간에 실력으로 저지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왔다.

일본은 거들떠 보지 않았고, 칼로 베듯이 한국으로부터돌아섰다.

당시의 후지야마(藤山)외상은 이때의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로한국측에 양보해도 라인
철폐 등의 호전은있을 수 없음으로 일한회담에의 영향은 고려않겠다.」고 했다.
외상인그는 일본의 국익 포인트가 한·일 회담이 아니라, 북송사업에 있음을 명확히 해보인 것이다.

일본은 이미, 한일간에 중립을 표방하던 미국으로부터북송선의 안전에 관한 군사보장을 얻어놓고 있었다. 일본정부가 인도주의를 내걸고, 북송실시를 결단하던 바로 그날, 미국정부는 「양국관계가 악화하여적대관계가 일어나지 않도록 희망한다」고 코멘트를 발표했다(菊池).
이 같은 미국의 희망에 한국의 이승만대통령이 따를지 자신이 없었던지, 미국정부 당국자는
「한국의 육해공군은 유엔군 사령관의 작전지휘하에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의 군사원조로 한국에 공여된 무기가 귀국(북송)문제로 사용되면 무기공여조건에 위배된다」고 덧붙였다.
일본의 북송선을실력으로라도 저지하려는 한국의 손발을 미국이 묶고 나온 것이다.

「한·일 양국은 싸우지 마라」는 미국의 코멘트가 키시()의 북송전략의 성공을 보장하게 되었다는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1959년 2월 '재일한국인 북송반대 국민대회'후 시가행진 데모하는 서울시민들.

 이승만 대통령의 격노

일본정부의 북송실행 결단에 한국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대표적으로는이승만 대통령의 코멘트가 있다.
그 다음달인 57 2 9 AFP통신의취재에 대한 답이다.

日本은 한국인을 공산주의의 노예로 몰아 부치려한다일본은 지금까지 (식민지 시대에)
한국인을 노예처럼,심하게는 가축취급해 왔으면서, 이번에는 10만이상의 한국인을, 공산주의자가 점령하고 있는 북한에 송환하는 동기가 인도주의에 있다고 말로 뻗대고 있다.
일본은 재일동포를 처우함에 있어 인도주의를 보인적은 전혀 없었다. 또일본이 이들 한국인에
대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른적도 없다.

국가 에고(ego)로서의 일본의 민얼굴을 이때의이승만대통령 만큼 꿰뚫고 있는 한국의 정치인은 드물 것이다. 일본인들은 생래적으로 인도주의 같은 보편주의이념은 무관한 사람들이다.
일본의 식자들이 흔히 하는 얘기다. 전전의그 허구한 침략전쟁의 반인도주의는 물론이고
조선을 식민지로 깔고 앉아, 한국인을 노예취급했던 그 극악의반인도주의에 무지하기만 한 「자유의 리더」 미국에 이승만은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의 공산치하가인민의 지옥인 것을 키시()나 미국이 모를 수 없는 일이었다. 앞에서 본 기쿠치(菊池)의 책에도, 당시 일본의 공안당국이 「북송한 사람들이 북에 가면 노두(길바닥)를 헤맬 염려가 있다」고 했다.

일본이 인도주의 깃발을 앞세워 냉전의 프론트를 허물려는 작태를 냉전의 사령탑인 미국이
묵인하고비호하는 처사 앞에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와 전쟁했던 한국의 대통령 이승만은 분노하는 것이다.

▲ 일본제국주의를 규탄하는 북송반대 데모대.

 키시의 술수

일본 에고(ego)의 중심에서 보면 키시()는 뛰어난 책략가였다.

2차대전이 끝나고 일본에 남은 한국인들을 일본사람들은 저들이 한 짓은 생각않고, 애물덩어리(厄介者-앗카이모노)로 취급했다. 전사회적으로는 재일한국인을 어딘가로 처리해 버리기를 바라는 「얏카이 바라이」(厄介い 애물치우기) 원망(願望)이 있었다. 일본사회에 미만했던 「애물치우기 원망」에서정치에너지를 뽑아낸 것은 기시정권이었다. 처음 북송의 물꼬를 찾아낸 것은 일본외무성이 적십자를 내세워서였지만, 김일성의 체제 선전욕과 야합점을 찾고 나서는, 북송동포를 끌어모으는「지상낙원」 선전과 일본인들에 의한 북송지원조직에 전일본의 정계가 초당적으로 임했다. 고문단에 자민당의전 수상 하토야마(鳩山一郞), 사회당서기장 아사누마(次郞), 공산당서기장 미야모토(宮本顯治) 등이 이름을 올렸다. 일본의 모든 신문들이 북송을 지지했다.

▲ 재일한국인들을 싣고 니이카타 항을 떠나는 만경봉호와 환송하는 가족과 조총련 단체.

 조센징 추방 앞에 한덩어리 된 일본의 좌·우파

일본에서 모든 정치세력과 언론이 하나로달아올랐던 정치사안은 그들이 대동아전쟁이라 하는 태평양전쟁 때 말고는 없을 것이다. 「애물덩이 쓸어내기」(厄介) 원망(願望), 구체적으로는 「조센징(朝鮮人) 추방」 욕구 앞에 전 일본인이 좌우 할 것 없이 하나되었던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키시()를 스승으로 여기는 수상 아베(安倍)의 정치노선을 가늠하기 위해, 키시를 좀더 뜯어 볼 필요가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토죠() 내각의 상공상(商工相)이었던 키시()는 전쟁이 끝나자,
A
급 전범용의자로 스가모 형무소에수감되었다. 이때에 일고(一高) 시절의 한 은사가 메이지(明治)전야 한국침략사상의 원조였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시를 하나 보냈다.
뜻은 「목숨이 아까와서 이름을더럽히지 마라」쯤인데, 미련없이 죽으라는 것이었다.
키시는답시를 남겼는데 그 뜻은 「이름을걸고 이 성스런 전쟁의 올바름을, 내세에까지도 읊어 전하겠다」였다. 일본의태평양전쟁이 성전으로 정당한 것이었다고 도쿄전범재판에서 당당히 신념을 개진할 각오를 키시는 드러내고 있다.
이일화는 키시의 장녀인 현 아베(安倍)수상의 어머니가 『文藝春秋』에 쓴 글 「나의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필자의 남편)에 들어있다(若宮啓文, 後保守のアジア観』).

▲ 야스쿠니 신사 참배 아베.

지난 12월 아베수상은 미국의 우려와 일본정계의예상, 주변국 경계를 깨고 수상으로서 야스쿠니(靖国)신사를 참배하여 일본의 2차대전이 「성전」이었음을 몸소과시해 보였다.
아베수상의 이 같은 행동이 외조부 키시의 정치신조에 가 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언저리에 21세기 아베정치의 한계와 족쇄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인가.

키시가 스가모의 옥중에 있을 때
, 도쿄재판의 검찰당국은 그를 「만주의 갱」, 「전쟁창도자」 등으로별렀으나, 미·소 간의 냉전이 진행되면서, 미국점령 당국의정책은 바뀌었다

일본 보수세력을 온존하여, 반공세력을 키워보자는미국측의 계산으로 키시는 기소되지 않고
석방의 날을 맞이한다. 키시가46 8월의 옥중일기에서 미소냉전을 알아보고, 자신이목졸림에서 벗어날 것이라, 내다 봤던 것은 유명하다.
나아가서는미·소 대립을 일본재흥의 호기로 보았다는 것이다.
감옥에서도 파워폴리틱스를 챙기는 대국안을 그는 놓지않았다.

(
참고로 이승만의 미소냉전의 착안점이라 할 정읍에서의 단정노선 천명은 46 6월이었고,
영국처칠수상의 「철의 커텐」발언은 46 3월이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대공(對共) 투쟁노선을 천명하는 닥트린의 선언은 47 3.)

이미 옥중에서 키시는 미 정보관계자들과접촉이 있었다. 한 외무성 관료는 키시가 미국 CIA로부터거액의 정치자금을 수령했슴을 밝히고 있다(孫崎享, 後史, 創元社). 여하튼 각료로서 미국과의 개전()에 앞장섰던 키시는 스가모에 다녀와 전후정치에 복귀하고서는 친미노선의 지도자로 변신해 있었다.

▲ A급 전범 도죠 히데키 수상(오른쪽)과 상공상 키시 노부스케.

이 외무성 관료출신이 키시를 평가하는점이 있다. 키시는 친미적 입장을 오히려 딛고서서,
  
미국을향해 일본의 국익과 주권을 확장하는 일에 수완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키시는 좌익세력의 반미를 교묘히활용하면서, 미국의 일방적 주군조약에 불과했던 미일안보조약을 미일간의 쌍무조약으로 바꿔놓았고, 그 이후의 정치를 향해 일본 내 미군기지의 폐쇄, 오키나와 반환등의 지향점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키시의 이 같은 정치행태와 술수는북송실행에 의한 반도분단 고착화 전략에서 결정적으로
발휘되고 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키시는 한일회담을적극 추진하는 입장을 취했다. 57년 수상이 되고 나서 첫 방미 직전에는 한일회담을 결렬시켰던, 예의 구보다(久保田) 망언을 철회케 하고, 회담재개를 위해 손썼다. 말할것도 없이 한일회담의 성사를 가장 원했던 나라는 한국도 아니고, 일본도아니고, 반공전선을 만들려는 미국이었다. 키시의 적극책선회는그의 첫 방미를 앞둔 시점이었다. 57 6월 미국에 갔을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키시를 골프라운드에 불렀고, 양기스타디움에서 프로야구의 시구도 했다. 3년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갔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하고의사이에, 일본문제로 번갈아 자리를 박차는 험악한 설전이 오갔던 것을 생각하면, 키시는 미국의 반 이승만 정서를 활용하지 않았을까. 미국에 다녀온다음해에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개인특사를 보내 비위를 맞추듯 첫 「사죄」 발언을 하기도 했다.(국회질의에서는특사의 개인발언이라며 키시는 부인했다.)

지내놓고 보면, 이것 역시, 키시가 미국말에 순종하여 한일회담에 더 적극적임을 미국향해
공개적으로 과시키 위함이었던 것 같다. 이 해(58)는 일본 안에서 조총련과 일본공산당, 사회당 등, 일본좌익의 북송선전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북송시행을 위해 불가결한과정인지라, 일본정부는 방치만으로 정책효과를 거둘 수 있었고, 공산, 사회당 등의 좌익들에 활동공간을 주어 대야(對野) 관계를 안정시킬 수 있었고, 조총련이 일본사회 안에서북한대표부로서의 위상을 굳히게 되는 계기가 되게했다.

재일동포사회가 민단과 조총련으로 확실히분단되어, 일본당국의 손바닥에 조종의 줄이 잡히는 것도 이때였다.

키시가 김일성이 환희작약해 마지않는북송을 실행하면, 반도남북의 분단을 고착시키는 전략효과가 있을 것임을 모를 수는 없는 것이다.

북송은 달리 말하면, 희망자가 11만이라 하였으니까, 노동력, 병력자원, 기술·자산 등의 전략자원을, 세계적으로 격화되고 있던 냉전의 프론트를 뚫고, 일본이 한국의 적방으로보내는 일이었다.
한국정부는 당연히 이를 무력으로 저지하겠다고 방침을 밝혔다.
미국이 북송을 향해 한국군의 손발을 묶는 것은 앞에서 보았다. 59 8월 인도 캘커타에서 일본적십자와 북한적십자 간에 북송의 최종적 실무협정이 성사되는 것은, 그 전 달 21일 미국의 하터 국무장관이 국제적십자 대표와 만나, 「거주지 선택의 자유」 등 인도주의 원칙에 동의해 보인 다음이었다.

결국 미국이 일본의 「인도주의」 간판을받아주고, 한국의 무력에 의한 저지 의지를 견제함으로써 북송은 성사된 것이다.

▲ 키시 이야기를 담은 '소화의 요괴' 책 표지(자료사진).

냉전의 리더인 미국으로 하여금, 남쪽으로부터 냉전의 프론트를 허무는 일에, 전우인 한국의
애끓는반대를 뿌리치고 동의하게한 키시의 친미외교는 일본의 세평대로 거의 요괴(妖怪)급이라 할 것이다.

일본의 아베수상이 조부 키시의 전략을흉내내어, 북과 수교하여 한반도의 분단을 영구화하고, 중국봉쇄를완결하려 들 것이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때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문제가, 북한이 원하는 경제지원을 위해, 일본이 북핵제재 서클에 구멍을 내는안면 바꾼 에고이즘이다. 미국은 과연 또한번 일본의 납치자를 내세운 인도주의 명분에 말려들어, 북핵이 북미대륙을 넘보도록 방치할 것인가.

이번에 일본이 북과 합의하여 북에서데려오려는 일본인 처 문제가, 딱 반세기 전 냉전상황 속에서 키시가 밀어 부치고 미국이 두둔하여 이뤄진, 반인도주의의 하나의 극치인 북송 오늘의
유산임을 미국은 한번돌아라도 볼 여유가 남아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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