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중 국민의 직접선거로 대통령에 재선되다

  • ▲ 6.25전쟁중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 최초의 직선 대통령이 된 이승만 대통령 취임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다.(1952)
    ▲ 6.25전쟁중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 최초의 직선 대통령이 된 이승만 대통령 취임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다.(1952)
       국회에서 통과된 직선제 개헌안은 보통 ‘발췌개헌안’으로 불렸다.
     그같은 명칭을 갖게 된 것은 정부 측 개헌안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고르고 국회 측 개헌안에서 국무위원 불신임권을 골라  만든 절충안이었기 때문이다. 

       1952년 3월에는 이승만을 뒷받침해 줄 자유당(自由黨)이 창당되었다.
    창당세력의 주축은 국회 의원들이 아닌 이범석 중심의 청년 운동 세력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원외자유당으로 불렸다.

       마침내 1952년 8월 2일 제2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6 · 25 전쟁이 한창인데도 불구하고,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직접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가  치루어진 것이다. 
       유권자의 88%가 참여한 선거에서 자유당의 이승만은 74.6%의 지지를 얻어
    신흥우, 이시영, 조봉암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통령 자리는 이범석, 임영신 등 9명의 후보 가운데서
    이승만이 지지한 무소속의 함태영 목사에게 돌아갔다. 
  • ▲ 미국 전략정보요원(OSS)들과 이범석 장군(앞줄 가운데 안경쓴이). 해방전 독립 투쟁 시절 모습이다.
    ▲ 미국 전략정보요원(OSS)들과 이범석 장군(앞줄 가운데 안경쓴이). 해방전 독립 투쟁 시절 모습이다.

   1952년 선거의 역사적 의미는 전쟁 중에도 현직 대통령이 재집권하기 위해서는
 선거를 치루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민주정치의 기본 요소인 자유선거 제도가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선거를 참관했던 유엔 선거감시위원단의 보고서도 긍정적이었다.
경찰의 선거 개입이 있기는 했지만 대세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유엔한국위원단의 보고서도 대한민국의 정치는 대의제와 민주제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정치는 급속도로 안정되어 갔다.
그 동안 정치적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방황하던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이
이승만 지지로 방향을 확실히 정했기 때문이다.
   
  양당제도가 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언론의 자유를 허용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그에 따라 한국 사회는 전쟁의 중압감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참혹한 전쟁으로 입은 무서운 파괴로부터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제도들도 하나씩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무엇 보다도 눈에 띄는 변화는 양당제도(兩黨制度)의 가능성이 나타난 것이다. 
   1954년 5월 20일에 치러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의 자유당(自由党)은
의석의 과반수를 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에 따라 정치도 안정되어 갔다. 

   그에 맞서 야당들은 1956년 9월에 연합하여 민주당(民主黨)을 조직했다. 
   그것은 조병옥과 같이 한민당의 전통을 계승한 민국당 세력에
 장면을 중심으로한 서북지방 출신 및 흥사단 세력이 가담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민주당은 흔히 구파와 신파로 구성되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 ▲ 왼쪽부터 조병옥, 모윤숙, 장면.(1948년 유엔이 참석한 대한민국 정부수립 승인 요청 대표단)
    ▲ 왼쪽부터 조병옥, 모윤숙, 장면.(1948년 유엔이 참석한 대한민국 정부수립 승인 요청 대표단)
  •    언론자유(言論自由)도 크게 늘어났다.
    1954년에 벌써 56종의 일간신문과 177종의 월간지를 포함하는 411종의 언론 매체가
     비교적 자유로이 정부를 비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유당 정부는 그러한 언론기관들을 통제할 공식 기구를 갖지 못했다.   

       비판 여론을 주도했던 것은 구 한민당 계열의 <동아일보>와 가톨릭 계열의 <경향신문>,
    그리고 흥사단 계열의 월간지 <사상계>와 <새벽>이었다.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분위기는 도시에서 강했다. 
       그러나 농촌 지역은 친정부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것은 주로 농지개혁으로 혜택을 입은 농민들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문화의 점진적 확산

       이승만 통치 밑에서 새로운 ‘자유주의 문화’가 조금씩 싹을 틔워 갔다.
    자유주의 문화라 함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개인주의적인 생활 방식이었다.  
       그것은 평등주의, 실용주의, 물질주의, 개척정신을 강조하는
     ‘미국적 생활 방식’을 주로 의미하는 것으로도 생각되었다.  

       그러한 자유주의 문화는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남한에 점차 퍼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6 · 25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더 확산된 것이었다. 
       전쟁을 계기로 미국인들이 몰려오고, 미국 원조의 덕택으로
    한국의 군인, 공무원, 기술자, 유학생들이 미국으로 몰려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자유주의 문화는 신문, 라디오, 영화를 통해서 일반 대중에게 소개되었는데,
    특히 1957년에 시작된 미군방송(AFKN)의 역할이 컸다.   
  • ▲ 미 8군 쇼 무대에서 인기 높았던 김시스터즈(1954).
    ▲ 미 8군 쇼 무대에서 인기 높았던 김시스터즈(1954).
  •    영어 학습열(學習熱)의 고조도 자유주의 문화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영어는 출세의 수단으로 생각되기도 했는 데,
    그것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영어를 사용함으로써
    영어가 사실상 경무대 안의 공용어가 되었던 사실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  
     
       국민 대다수에게 미국 문화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 때문에 나라가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청년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서양의 선진문명을 배우자는 한말 개화파(開化派)들의 전통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문화의 확산을 막는 장애물들도 많았다.
    봉건적이고 공동체적인 유교문화가 여전히 국민의 의식 속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 시대에 대중에게 강제로 주입된 군국주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일본 문화도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대통령 재임기간에 대한민국은 느리게나마
    문화적으로 중국 중심의 대륙문명권(大陸文明圈)에서 벗어나
     미국 중심의 해양문명권(海洋文明圈)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문명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중심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다. (계속)

    이주영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 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