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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전쟁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프랑스 장군이 있다. 라 파이예트 장군이다. 미국은 그의 공적을 기리며 전략 핵잠수함에 그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고, 여전히 그를 존경의 대상으로 삼는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도움을 준 미국 군인이 있다. 美해군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인 중 한 명인 알레이 버크(Arleigh Burke, 1901~1996) 제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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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군참모총장 시절의 알레이 버크 제독. 그는 美해군에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해군이다.
알레이 버크 제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함대에서 구축함 전대장과 기동함대 참모장을 맡아 전공을 세웠다. 2년 임기의 해군참모총장을 3번이나 연임하며 미국 해군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알레이 버크 제독은 1949년 항공모함 건조계획을 폐지시키려는 국방부 결정에 항거한 ‘제독들의 반란(Revolt of Admirals)’을 주도했다. 해군참모총장 시절에는 원자력 잠수함 사업 추진, 초대형 항공모함 11척 건조 등 지금 미국의 대양해군을 세운 사람으로 美해군에서는 니미츠 제독과 함께 가장 존경받는 해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美해군은 1991년 2세대 이지스 구축함 1번함의 이름을 ‘알레이 버크’함으로 지었다. 당시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을 함명으로 제정한 것은 처음이어서 큰 화제를 낳았다. 우리 해군의 세종대왕급 이지스구축함도 ‘알레이 버크함’과 동급이다.
알레이 버크 제독과 우리나라 해군의 관계도 깊다. 6.25전쟁 당시 백선엽 예비역 대장과 인연을 맺으며 한국 안보에 크게 기여했다. 6·25전쟁 중이던 1951년 동부전선에서 1군단장이던 백선엽 장군을 도와 함포사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강원도에서 진지전을 수행하려면 포격지원이 필수적인데 당시 한국군은 포병 전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백 장군은 동해 해역을 맡은 제5순양함 분대사령관 알레이 버크 제독을 찾아가 함포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순양함 함포 1발의 가격은 1만 달러 수준으로 고급 승용차인 ‘캐딜락’ 가격과 비슷했다. 때문에 함포 한 발을 쏠 때마다 장병들은 “캐딜락 날아간다”고 외칠 정도였다. 그럼에도 알레이 버크 제독은 백 장군이 요청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함포사격을 지원했다. 그는 1군단을 방문해 진지를 직접 돌아보며 백 장군과 함께 효과적인 함포지원 방안에 대해 연구할 정도였다.
6.25전쟁이 끝난 뒤에도 알레이 버크 제독은 한국을 도왔다. 1953년 백선엽 대장이 육군참모총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자 알레이 버크 제독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 반드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약속을 받아내라고 강력히 권고하고, 백 대장이 국방차관을 만나는 자리에 배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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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년 제5순양함 분대사령관 당시의 알레이 버크 제독(오른쪽 파이프를 문 사람)과 백선엽 당시 1군단장. 그 덕분에 강원도에서는 포병지원 걱정이 없었다.
알레이 버크 제독은 한국 해군 키우기에도 도움을 줬다. 1951년 초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을 때 열악한 도서관을 보고 美해군 기관지인 U.S. Naval Institute Proceeding(1951년 6월호)에 도서기증을 호소하는 글을 기고, 2만여 권의 도서를 모아 기증하기도 했다.
제5순양함 분대사령관 재임시절에는 연락장교로 파견 온 한국 해군 장교들이 美해군의 작전, 교리(FM), 무기체계, 당직근무, 장비운영 등 함정 운영체계를 습득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연락장교들이 美함정의 당직근무를 겸직하도록 하고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파견기간 연장을 한국해군에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 연락장교로 였던 박찬극 예비역 준장은 이때 그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알레이 버크 제독은 박 제독을 ‘내 한국인 아들’이라며 美해군장성들과 친분을 맺게 해주고, 박 제독이 주미(駐美) 해군무관으로 근무할 때 함정 대여사업 등에서 도움을 줬다.
알레이 버크 제독은 참모총장으로 재임하던 1955년 8월부터 1961년 8월까지 ‘미국 해군 함정대여에 관한 한미협정’에 따라 경비함, 상륙함, 호위구축함(DE), 고속수송함(APD) 등 32척의 함정을 제공해 한국 해군이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놓아줬다.
퇴임 전에는 구축함을 한국 해군에 대여할 수 있도록 행정조치를 해놓아 우리 해군이 1963년 DD-91 충무함을 도입하도록 도왔다.
퇴임 후에도 한국은 그의 도움을 받았다. 1967년 10월 한국의 구축함 도입에 관한 함정대여 법안이 美상원 군사위원회에서 부결되자, 예비역 신분이었던 알레이 버크 제독은 상원위원회 전문위원, 보좌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구축함 대여 필요성을 설득, 1968년 DD-92 서울함, DD-93 부산함이 한국 해군의 품으로 왔다. 이 함정들은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해군의 주력함으로 맹활약을 펼쳤다.
1958년 한국해군에 인도된 상륙함(LST) 수영함, 북한함은 파월장병 수송, 팀스피리트 훈련 등에 참가했고 2005년 퇴역하였다. 지금은 지자체에 대여되어 함상공원으로 바뀌었다. 최초의 구축함인 충무함은 27년간 활약하다 1990년 퇴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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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해군은 알레이 버크 제독의 공적을 기려 이지스 구축함의 1번함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생존자 이름이 붙은 건 처음이었다.
이처럼 우리나라 안보를 키워준 은인의 공적을 기려 해군은 11월 15일, 진해 해군사관학교 통해관에서 최윤희 해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알레이 버크 제독 흉상 제막식을 개최한다.
해군은 알레이 버크 제독이 현역시절 2번, 퇴역 후 2번을 방문했던 해군사관학교 교정에 흉상을 전시하기로 결정했다. 해군사관생도들이 국가안보와 해군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적을 기리고,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흉상 제막식에는 백선엽 예비역 대장,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의 부인이자 ‘바다로 가자’를 작곡한 홍은혜 여사, 알레이 버크 제독이 ‘양아들’이라고 부를 만큼 각별했던 박찬극 예비역 준장(해사 3기, 86세) 등 해군 예비역 장교, 해군 주요 지휘관, 해군사관생도, 주한 美해군사령관 등 120여 명이 참석한다.
제막식은 한·미 양국의 국기에 대한 경례, 흉상 제작 경과보고, 제막·헌화 순으로 진행된다. 제막식에 이어 참석자들은 알레이 버크 제독이 생전에 해군사관학교에 기증한 도서와 관련 역사기록 전시물(관련 사진 28점)을 관람하며 고인의 업적과 뜻을 상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해군사관학교에 세운 알레이 버크 제독의 흉상은 6․25전쟁 60주년 사업으로의 일환으로 해군 정비창에서 제작했으며 가로 57cm, 세로 35cm, 높이 90cm 크기의 청동 흉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