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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시 서기 실각 후폭풍이 중국에서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 이후 최대의 정치 격랑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자 미국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의 단초가 된 왕리쥔(王立軍) 전 충칭시 공안국장의 정보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왕리쥔은 지난 2월 26일 중국 쓰촨(四川)성 성도 청두(成都)시의 미국 총영사관에 찾아와 망명을 시도하여 이번 사건의 도화선을 만든 인물이다.
홍콩의 명보(明報)는 22일자에서 미국의 일부 전ㆍ현직 고위 관리들이 미국 정부가 왕리쥔의 망명을 받아들이지 않아 중국 권력 핵심부의 상황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상실했음을 지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같은 지적은 보시라이를 비호한 정치국 상무위원 저우융캉(周永康)의 실각설이 대두되고 중국 지도부가 톈안먼 사태 이후 최대의 선전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가운데 나왔다.
이러한 지적에 설득력을 더해 주는 사실은 군에 대한 통제 강화 노력이다.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라는 마오쩌둥(母澤東)의 말은 중국 정치과정에서 부인할 수 없는 '진리'기 때문이다.
명보에 따르면 왕리쥔은 청두 총영사관측에 자신이 보시라이의 정치ㆍ경제적 비리등 각종 정보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중에는 보시라이의 처 구카이라이(谷開來)의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 독살 연루 내용도 들어 있었다.
구카이라이의 독살 연루와 관련, 현재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고 있으며 중국과 영국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미국 고위 관리는 당시 왕리쥔이 들고 온 정보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시인했다.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 벌어진 일들이고 동기가 개인적 원한 관계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판단의 근거였다.
또한 왕리쥔은 미국 등 서방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고 태도 역시 신뢰를 주지 못했다. 이 때문에 들고 온 것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없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결론은 왕리쥔이 보시라이와 후진타오(湖錦濤)와의 통화도 도청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보면 성급한 것이었다.
미국 관리들은 일관되게 왕리쥔이 '정치적 비호'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명시적으로 요청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미국 영사관에서 24시간 넘게 머무른 사실은 그가 망명할 의사를 갖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24시간 동안 워싱턴에서는 회의를 거듭했다. 왕리쥔은 미국측의 주저를 의식했는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하기도 했다고 미국 관리는 전했다.
왕은 자신으로 인해 지도부의 교체가 있더라도 공산당의 지배체제에는 위협이 되지 않으며 보시라이가 실각해도 장기적으로 중미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1989년 톈안먼 사태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이야기였다.
얼마 전 망명지 미국에서 작고한 중국 반체제 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가 톈안먼 유혈 진압 직후, 베이징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해 망명을 요청하는 바람에 중미간 외교적 긴장 관계가 조성된 적이 있다. 팡의 미국 망명이 허용될 때까지 미 대사관 출입이 통제되기도 했었다.
왕리쥔 처리 문제와 관련 오바마 행정부의 결정을 옹호하는 이도 있다. 케네스 리버탈 전 아시아 담당 고위 보좌관은 왕리쥔이 명확하게 '정치적 비호'를 요구하지 않은 점을 들어 이 건에 끌려 들어가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면 그 결정은 타당하다고 말했다.
왕리쥔이 영사관측의 배려로 그가 신뢰하는 중앙 고위 관리와 통화한 뒤 스스로 영사관을 나갔으며 충칭시로 압송되는 대신 중앙의 국가안전부로 이송된 사실도 당시의 미국의 결정이 적절했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지적된다.
그당시 오바마 행정부의 판단은 적절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풍 전야의 중국 정계를 바라 보며 미국 정보 계통에서는 제발로 그물 안에 들어 온 대어(大魚)를 방류했다고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