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같으면 朴대통령보다 더 잘할 수 있었겠느냐?”
  • 아버지 세대를 위한 변호(辯護) 
      
    대한민국,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발버둥친 아버지 세대의 피·땀·눈물의 결정체
    金成昱   
     
     1.
  •  <밴드의 애국가 연주가 끝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코를 풀더니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일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박대통령은 연설원고를 옆으로 밀쳐버렸다.
     
     “광원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대통령은 연설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본인도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되던 박 대통령의 연설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광부, 간호사뿐 아니라 곁에 있던 육영수(陸英修) 여사도 손수건을 꺼내 들면서 공회당 안은 ‘눈물바다’로 변했다.
     
  •  朴대통령은 참석한 광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파고다 담배 500갑을 전달한 뒤 강당 밖으로 나왔다. 30분 예정으로 들렀던 광산회사에서 박대통령 일행이 강당 밖으로 나오는 데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함보른 광산 회사 측에서는 박대통령에게 한국인 광부가 지하 3,000m에서 캐낸 석탄으로 만든 재떨이를 기념으로 선물했다. 朴대통령과 陸여사는 울어서 눈이 부어 시선을 바로 두지 못했다.>
     
     1964년 12월17일 서독 루르탄광지대에서 있었던 우리 현대사 한 페이지다. 서독에 일하러 간 광부와 간호사들, 그들의 월급을 담보로 한국의 경제개발 자금을 빌려온 朴대통령. 이들은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後孫(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자”고 울먹였다.
     
     朴대통령은 광산회사를 나온 뒤 눈물을 멈추려 애쓰고 있었다.
     
     2.
     아버지 세대는 草根木皮(초근목피)와 보릿고개 속에서도 “後孫(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자”며 뼈 빠지게 일했다. 2012년 대한민국이 누리는 풍요는 이들이 내던진 생명의 결실이다.
     
     북한은 일제의 만주침략 기지였던 탓에 한국에 비해 조건이 좋았다. 해방 직후인 1946년 북한엔 800개 이상 대규모 공장이 있었다. 종업원 3000명 이상 공장 200개. 1인당 철도 길이, 1인당 발전량 모두 일본을 앞섰다.
     
     남한은 끔찍했다. 문맹률 80%. 1인당 GDP 70불로 세계에서 인도 다음으로 가난한 나라로 기록된다. 일제 때 있던 중소기업은 6·25사변으로 60% 이상 파괴됐다. 잿더미 속에서 시작한 한국이 수출 세계7위·무역규모 세계9위·GDP 15국가로 큰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敎育立國(교육입국)’을 내세워 6년제 초등교육을 의무화시켰다. 없는 살림에 정부 예산 10% 이상을 교육에 쏟았다. 80% 문맹률은 59년 22.1%로 줄었다. 李정권 말기 초등학생은 26배, 중학생은 10배, 고등학생 3.1배, 대학생은 12배로 늘었다.
     
     우리는 생각 없이 이승만에 돌을 던진다. 하지만 미흡하고 서툴러도 李대통령이 헌법을 정지하거나 국회를 해산한 일은 없었다. 6·25사변 중에도 자유선거가 중단되지 않았다. 다른 신생국처럼 절대권력을 정당화하거나 우상화하지도 않았다. 전체주의로 치달았던 김일성과 태생부터 달랐었다.
     
     李대통령 주변엔 언제나 강력한 비판세력이 있었다. 54년 통계에 따르면, 언론기관만 411종에 달했다. 비판세력에 둘러싸인 李대통령은 초대 내각 구성 때도 이윤영 목사를 총리로 임명하지 못했었다.
     
     나라 안팎의 적들은 그들의 비판이 反정부인지 反국가인지 모를 경계를 오고 갔다. 당시는 민주주의를 지탱해 줄 중산층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反共(반공)주의”로 국가의 생존을 지탱해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있었다 하지만 김일성이 소련에서 지원받은 만큼 미국에서 지원받진 못했다. 소련은 북한을 全세계 혁명을 위한 기지로 보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반면 미국은 틈만 나면 고집스런 이승만을 몰아내고 장면 같은 온건한 인물을 세우려 애썼다. 동맹국의 인기 없는 정부와 손을 끊어 자국민 비난을 피해 보려는 ‘절연정책’은 계속됐다. 미국은 53년 반공포로 석방 시 李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한 ‘ever ready’작전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3.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이 깔아 놓은 대한민국이라는 도로 위를 신명나게 달려갔다. 근대화는 곧 일자리를 뜻했다. 60년대 한국의 실업률은 0.297로서 미국(0.393), 일본(0.336)보다 낮았다. 70년대(0.283 : 미국 0.399/일본 0.333), 80년대(0.307 : 미국 0.418/ 일본 0.332), 90년대(0.293: 미국 0.448 일본 0.368) 모두 실업률은 미국·일본에 비해 한참 낮아졌다.
     
     평균수명도 현저히 높아졌다. 1950년(47.5세), 55년(52.6세), 60년(55.2세), 65년(57.6세), 70년(62.6세), 75년(64.8세), 80년(65.9세), 85년(69.6세), 90년(71.1세). 2011년 현재 한국의 평균수명 74세를 넘어섰다, 북한보다 13년이나 오래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
     
     4.
     중학시절 ‘維新(유신)’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 앞에서 “인권을 탄압한 독재자 박정희”를 비난했다. 10형제 중 3째로 고학으로 대학을 마치고 고등고시를 합격한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같으면 朴대통령보다 더 잘할 수 있었겠느냐?”
     
     염치없는 후손들은 만들어진 결과만 보면서 투덜대기 십상이다. 과거와 역사는 보지 않은 채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정죄해 버린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보릿고개 이야기를 수백 번은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살았던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택시 한 번 타지 않고 지하철·버스만 이용하셨다. 아버지는 고생하며 만들어 낸 약간의 성취를 아들들이 누리는 모습에 가장 큰 보람을 느끼며 사셨다.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後孫(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자”는 朴대통령의 울먹인 연설은 슬프도록 孤苦(고고)하게 살다 간 우리 아버지 세대의 본심일 것이다. 대한민국은 그래서 박정희, 이승만의 나라가 아니요,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발버둥친 아버지 세대의 피·땀·눈물의 결정체이다. 부정할 수 없는 우리 핏속의 원형질이다.
     
     서른 넘어 밥벌이를 시작하며 아버지와 긴 시간 대화해 본 적이 없었다. 답답하고 고집 센 연설조 훈계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그러나 우리는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었던 아버지 세대의 희생을 밟고 서 있다. 나 역시 그가 생전에 꿈꿨던 세상의 한 끝을 쥐고 이제 또 다른 끝을 이어나간다.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지 못한 데 대해 아버지 세대가 미안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늘었다. 그러나 먼저 필요한 것은 우리의 깊은 感謝(감사)이다. 풍요를 누리는 이들이 풍요를 만들어 낸 이들에 대해서 감사치 않는다면 미래는 惡德(악덕)에 합당한 저주가 될지 모른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청년의 불평과 원한 이전에 감사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