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끝없는 도전 ⑳ 

     「아, 그러십니까?」
    정색한 루즈벨트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헤이 국무장관은 지난 7월 초에 병으로 죽었던 것이다. 그때 윤병구가 나섰다.
    「각하, 미스터 리는 대한제국 황제의 비밀특사 신분입니다. 우리는 조선인 이민자 8천과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루즈벨트가 머리를 끄덕였다.
    「국무부로 청원서가 넘겨지면 미국은 정부 차원에서 도와드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의 성과를 얻었으나 그 순간에 대리공사 김윤정, 일본 영사 아카마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갔다.

    「자, 그럼.」
    하면서 비서관이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우리는 일어서야만 했다. 면담 시간이 30분을 훌쩍 넘은 것이다.

    루즈벨트로서는 외국 국가 원수급의 대우를 해준 셈이었다. 집무실을 나왔을 때 윤병구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두 눈에는 물기가 잔뜩 배었다.

    「형님, 나는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소.」
    윤병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주르르 눈물을 쏟았다.

    목이 메인 내가 윤병구의 손을 쥐었다. 가슴이 미어졌는데 그것은 기쁨 때문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답답함의 비중이 더 많았다. 윤병구는 워싱턴 정가의 사정을 잘 모르는 것이다. 김윤정과 아카마스의 유착과 배신, 음모가 난무하는 이곳 정서를 말해주지 않았다.

    세거모어 힐 밖에는 동포 수십 명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를 보더니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아우가 말씀 드리게.」
    내가 윤병구의 어깨를 밀면서 말했다. 윤병구는 보고할 자격이 있다.

    머리를 끄덕인 윤병구가 동포들 앞으로 다가가 섰다. 그리고는 상기 된 얼굴로 소리쳤다.
    「동포 여러분! 루즈벨트 대통령께서는 청원서를 받아 보시고 대한제국을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해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불끈 주먹을 쥔 손을 흔들면서 윤병구가 한마디씩 힘주어 외치고 나자 동포들이 환성을 질렀다. 우리들을 구경하려고 기자들, 주민들이 모여들었으므로 세거모어 힐 주변은 떠들썩해졌다.

    윤병구가 말을 이었다.
    「여러분! 이제 일본놈들의 압제를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여러분들이 성원해주신 덕분이오!」

    다소 과장은 했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사실이다. 루즈벨트의 태도는 호의적이었으며 표현도 정확했기 때문이다.

    동포들과 헤어져 둘이 남았을 때 내가 윤병구에게 말했다.
    「서둘러야겠네. 오늘 중으로 청원서를 다시 만들어서 공사관에 갖다 줘야겠어.」
    「밤을 새워야지요.」
    「서박사가 워싱턴에 머물고 계시니 잘 되었어.」

    필라델피아에서 온 서재필이 면담 결과를 들으려고 워싱턴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늦게 워싱턴에 도착했더니 임시 숙소로 정한 스미스씨 별채에는 서재필과 김일국 그리고 교포 10여명까지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전보로 내용을 다 들은 일동은 환성을 지르며 우리를 맞는다.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청원서를 다시 만들기로 하지.」
    서재필이 먼저 말했다. 나는 서재필의 충혈 된 두 눈을 보는 순간 다시 가슴이 메었다.

    그때 누군가가 두 손을 번쩍 들더니 소리쳤다.
    「만세! 만세! 대한제국 만세!」

    깊은 밤이어서 목소리를 낮추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