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끝없는 도전 ⑨  

     기숙사에는 동양인 유학생이 꽤 있었는데 중국, 일본인은 우리와 용모가 비슷해서 쉽게 구별하지 못했지만 필리핀인은 금방 눈에 띄었다.

    내 방에서 두 번째 옆쪽 방에 기숙한 에르난도 구피하고 알게 된 것은 식당에서 같이 그릇 닦는 일을 하게 되었을 때부터다. 구피는 작은 키에 체격도 가늘었지만 큰 눈에 검은 눈동자가 또렷해서 인상이 강했다.

    그러나 평소에는 눈을 내려 깔았고 말도 적은 편이어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였다. 그래서 내 옆방의 로버트는 그를 「갈색 그림자」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4월 중순 쯤 되었던 것 같다. 그날도 그릇을 씻고 난 우리가 잠깐 쉬고 있을 때 구피가 앞쪽을 향한 채로 묻는다.
    「너희들 나라, 일본과 연합 할 거야?」

    우리는 식당 뒷마당의 장작더미 위에 앉아 있었는데 주위는 조용했다. 내 시선을 받은 구피가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곧 연합한다는 소문을 들어서 그래.」
    「연합?」
    되물었던 나는 구피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식민지」로 말하려다가 내 입장을 모르니 어중간한 「연합」이란 단어를 붙인 것이다.

    하긴 내가 전액 장학금을 받았지만 이곳까지 오려면 대한제국의 특권층이어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한제국은 곧 일본의 속국이 돼. 지금의 러일전쟁도 대한제국을 차지하려는 강자들의 전쟁이야.」
    「그렇군.」

    머리를 끄덕인 구피가 말을 잇는다.
    「필리핀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미국이 차지하게 되었어. 미국은 스페인한테 2천만불을 주고 필리핀을 양도 받았지. 2백년동안 스페인의 통치를 받던 필리핀이 승자의 전리품이 되어서 이제 미국 소유물이 되었다구.」

    구피의 영어는 정확했으며 조리가 있다. 나는 반쯤 입을 벌린 채 구피를 보았다.

    오후 5시쯤 된 것 같다. 아직 식당에는 저녁 손님이 들지 않아서 뒷마당은 조용했다. 다시 구피의 목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나는 독립운동가의 자손이야. 우리 가문은 1백여년동안 스페인에 대항해서 싸웠어. 그리고는 이제 미국에 대항해서 싸우려고 난 2년 전에 이곳에 왔어.」
    「구피, 어떻게 싸우겠다는거냐?」
    「나는 공존파야.」
    「공존파라니?」
    「미국과 같이 공존하면서 미국의 부와 기술을 나눠받은 후에 독립을 쟁취한다는 파지.」
    「다른 파도 있나?」
    「무장투쟁파야. 싸워서 미국세를 몰아내고 필리핀만의 독립정부를 세우겠다는 파벌인데 내 삼촌이 지도자야.」

    그리고는 구피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내 아버지는 공존파 지도자고, 무장투쟁파와 공존파가 잘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무장독립파만 존재한다면 나라는 폐허가 될 것이고 공존파만 존재한다면 미국 식민지에서 헤어날 수 없을테니까. 미국이 바보가 아니거든.」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구피를 바라본 채 말문을 떼지 못했다.

    필리핀이 200년간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는 것도 안다. 미서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스페인에게 2천만불을 주고 물건처럼 필리핀을 넘겨받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필리핀인들이 이렇게 독립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처음 듣는다.

    그때 구피가 말을 이었다.
    「리, 난 필리핀에 돌아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몰라. 하지만 필리핀 독립에 손톱 끝만큼의 기여는 하고 떠날꺼야.」

    이것이 약소국 애국자의 자세일 것이다. 나는 목이 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