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할아버지 조만수는 육중한 체격에 둥근 얼굴의 호인형 인상이었지만 깐깐한 성격이었다.
    외삼촌 조경문에게 가업을 물려주었다가 5년만에 다시 경영권을 빼앗고 자금을 동결시켜 꼼짝 못하게 한 것만 봐도 그렇다.

    외삼촌은 딸만 둘 낳은데다 둘다 제 부모를 닮았는지 공부는 못하고 말썽만 피웠는데 외할아버지의 이동규에 대한 관심은 각별했다. 이동규가 「LA사람들」과 단절하고 있다는 것을 안 후에는 한달에 한번씩은 꼭 들려서 용돈을 주고 갔다.

    심명하를 근처에 있는 호텔 커피숍에서 기다리게 한 이동규가 조만수를 만났을 때는 오후 5시 반이다.

    「어, 잘왔다.」
    어머니한테서 미리 연락을 받은 조만수가 웃는 얼굴로 이동규를 맞는다. 오후 일찍 도착한 어머니는 콘도 찜질방에 가 있다고 했다.

    소파에 앉은 채로 이동규의 큰 절을 받은 조만수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어, 그래. 너한테서 절 한번 잘 받는다.」

    이동규는 외할아버지한테서 풍기는 따뜻한 기운에 금방 젖는다. 열두살때부터 아버지 없이 자라온 이동규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항상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면서 안정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주 집을 비웠는데 집안 살림은 가정부가 맡았고 가정교사가 이동규의 학습 스케줄에다 진로 상담까지 맡아주었다. 돈이 있으면 다 되는 세상이다.

    가정부가 다가와 둘 앞에 마실 것을 내려놓고 소리 없이 돌아갔다.
    조만수의 바닷가 대저택 응접실 안이다. 응접실도 세 곳이나 있어서 이곳은 3층의 가족용 응접실이다. 유리벽 밖으로 동해 바다가 수평선까지 드러나 있다.

    조만수가 인삼차잔을 들면서 물었다.
    「그래, 너, 미국 간다면서?」
    이동규의 시선을 잡은 조만수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네 애비하고도 화해를 해야지. 고집부릴 필요는 없는 거다.」

    이동규는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입을 열기도 전에 조만수가 말을 잇는다.
    「더구나 네 애비가 재산을 떼어준다고 하지 않느냐? 받을 건 받아야 한다. 넌 그럴 권리도 있고.」
    「......」
    「네 형이 다 받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미국에 가서 잘 처리를 해라.」
    「저기, 할아버지.」

    이동규가 부르자 조만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서 말하라는 표정같다. 그러나 막상 시선을 받고나니 이동규는 가슴이 뛰는 바람에 침부터 삼켰다.

    그때 조만수가 물었다.
    「그래, 언제 떠날 예정이냐?」
    「다음달 12일요.」
    「음, 그럼 보름 남았구나.」
    「예에.」
    「그럼 언제 돌아올거냐?」
    「이. 이년.」
    「이년 후에?」
    했다가 조만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 스물 넷에 돌아오겠구나.」

    이년이라고 말한 것은 군복무 기간을 엉겁결에 말했던 것이다.
    다음달 12일은 바로 입영 날짜다. 여기서 털어놓지 않으면 홍수에 휩쓸리듯이 미국행 비행기를 타게 될 것이라는 조바심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반대로 털어 놓는다면? 그때는 미국행이 좌절될 가능성이 많다.
    입영날짜까지 받아놓고 도망치면 범법자가 된다. 할아버지는 그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이동규가 헛기침을 했다.
    「할아버지. 저, 군 입대를 지원해서 입영 날짜가 나왔어요.」
    이동규의 목소리가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