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자였다                                      

    민주주의의 핵심요소는 대통령 직선제이다

       민주주의 제도를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최고 통치자를 국민이 직접 선거를 통해 뽑는 대통령 직선제이다.  그 제도만  제대로 시행될 수 있다면 사회의 다른 측면에서도 많은 진보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이다. 그러나 민주적인 요소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세습적 특권을 가진 왕과 귀족이 남아 있는 군주국들은 엄밀하게 말해 민주국가라고 할 수 없다. 영국, 일본, 덴마크, 네덜란드 같은 군주국들이 바로 그 경우인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에서 정의된 개념의 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경우에 민주화는 ‘북한화’와 ‘공산화’를 의미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최고 통치자의 자리가 자유선거도 없이 자식에게 세습되는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대통령 간선제로 출발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1948년에 건국된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의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출범하였다. 당시 빨리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뽑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식 대통령제에 오랫동안 익숙해 있던 이승만은 최고 통치자가 국민에게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국민에 의해 직접 선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오래동안 외국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국내 지지기반이 약했고, 따라서 엘리트 층으로 이루어진 제헌국회에서 뿌리가 약했다. 그 때문에 그는 그가 원하는 북한출신의 이윤영 목사를 국무총리로 인준받는 데 실패했고, 임영신 상공장관과 같은 자신의 심복을 야당의 사임 압력으로부터도 지켜주지 못했다. 
        건국 후 2년만인 1950년 5월의 총선거로 구성된 제2대 국회는 그에게 더 불리했다. ‘건국세력’의 중요한 구성원인 김성수의 한민당도 권력 분배에 대한 불만에서 이승만에게 등을 돌린 상태였다. 그들은 민국당의 새 간판을 내걸고 더 많은 세력을 모아 이승만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좌파 성향을 보였던 무소속 의원들도 이승만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남북협상과 좌우합작의 이상을 내세우면서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던 김구, 김규식의 추종세력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 김약수, 노일환과 같은 10여명의 과격파들은 ‘국회 공산당 프락치 사건’으로 제거되기는 했지만,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의 지위는 여전히 약했다. 그것은 이승만이 이윤영 목사를 또 다시 국무총리로 임명하려다 좌절된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의 6.25남침으로 국가가 대혼란에 빠지면서 이승만의 입지는 더욱 더 어려워졌다. 북한군에 밀려 정부가 부산으로 쫓겨가자, 오위영, 김영선, 정일형을 비롯한 많은 국회의원들은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묻겠다고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들은 1952년에 선출하게 될 제2대 대통령으로 장면을 추대하려고 했다. 미국 대사관, 다시 말해 미 국무부도 그들을 지지했다. 국회 간접선거로 이승만이 다시 대통령에 선출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대통령 직선제는 이승만이 처음 도입했다

        이승만이 진짜 독재자였다면 이러한 상태에서는 아예 선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6.25전쟁 중이었으므로 국가 비상사태를 이유로 얼마든지 선거를 취소하거나 뒤로 미룰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 미국 민주주의에 익숙해 온 이승만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대통령 선거방식을 국회 간접선거에서 국민 직접선거로 바꾸려고 하였다. 자기는 국회의원들로부터는 배척을 당하고 있지만 국민 대중에게는 인기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52년 국회가 이승만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부결시키자, 그는 힘으로 밀어붙였다. 임시수도 부산과 경남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의 뜻을 따르는 원용덕 헌병사령관은 국회 의원들이 탄 버스를 연행하고 그들 가운데 일부를 국제공산당 연루 혐의로 구속하였다. 이른 바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대통령의 강경책에 주춤해진 국회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행정부의 개헌안과 국회의 개헌안 가운데서 필요한 부분들을 골라 절충안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핵심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의 수용이었다. 
       그것은 무리한 방식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국내외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  방향은 옳은 것이었다. 간선제 보다는 직선제가 자유선거의 명분(名分)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회의원들은 이승만의 강경조치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일 그 때 국회의원들이 소신을 가지고 끝까지 버텼더라면 대통령 직선제는 통과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6.25전쟁을 주로 수행하고 있던  미국이 국회를 지지하고 이승만 제거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한 번도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지 않았다

       1953년에 휴전이 되어 나라가 안정되어 가면서 무리수가 몇 번 따랐다. 1954년에는 이른바 ‘4사5입’ 개헌의 무리수가 있었다. 그것은 두 번으로 정해진 대통령 출마 횟수를 건국대통령 이승만에게만 제한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1958년에는 ‘24 보안법 파동’의 무리수가 있었다. 그것은 비판적인 언론과 북한 동조 세력을 규제하기 쉽도록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려는 데서 일어났다. 법안의 통과를 막으려고 야당인 민주당 국회 의원들이 의사당을 점거하자, 정부가 무술 경관들을 동원하여 농성 국회의원들을 밖으로 끌어낸 다음 자유당 의원들만으로 통과시킨 사건이었다. 미국은 이승만에 대한 항의로  다울링 대사를 한 달간 소환하였다.
       1959년에는 경향신문 폐간의 무리수도 있었다.  경향신문은 카톨릭 계열로 구 한민당 계열의 ‘동아일보’와 흥사단 계열의 ‘사상계’와 함께 이승만 정부를 맹렬히 비판해 오던 야당지였다. 정부의 자제 호소에도 불구하고 경향신문이 어느 간첩의 체포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또 다른 간첩을 체포하지 못하게 하자, 이승만 정부는 국가 안보에 피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그 신문을 폐간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12년간에 걸친 이승만 통치기에는 한 번도 국회가 해산되거나 선거가 중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54년의 국회의원 선거를 제외하고는 모든 선거가 이승만에게는 불리한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해당 년도에 꼬박꼬박 치러졌다. 전쟁 중에도 선거는 치러졌다.
      아직 관권선거, 부정선거의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자유선거의 원칙이 기본적으로는 지켜졌기 때문에, 혁신계 정치인 조봉암도 1952년과 1956년의 대통령에 출마하여 적지않은 지지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56년의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인 민주당의 장면이 여당인 자유당의 이기붕을 제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최대 실수는 이기붕의 아들을 양자로 맞고 이기붕과 운명이 얽히면서 1960년의 선거에 출마하게 된 것이었다. 자유당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크기는 했어도 이승만 개인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여전했기 때문에,그의 당선에는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이 병으로 미국에서 사망함으로써 대통령 후보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한 자유당의 부정선거라는 함정에 빠져 결국은 4·19를 만나고 하야하게 된다.
      
    혁명과 극한투쟁을 미화하는 사회풍토의 희생자

       이승만은, 그의 후원자인 로버트 올리버 박사의 말대로, 개인의 자유와 자유방임의 원리를 믿는 ‘제퍼슨적 자유주의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후진적인 신생국을 건국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부딪힌 수많은 장애물 때문에 자기 소신대로 행동하기 어려웠다.
       신생국 대한민국은 출범부터 제주4·3사건과 10·19여수-순천 사건등으로 무너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게다가 건국 2주년도 못된  1950년 6월에는 북한의 남침으로 국가 자체가 붕괴할 지경이었다.
       그러한 국가 생존이 걸린 위기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운동을 할 자유까지 허용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건국 3개월만에 공산주의자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반공을 최우선의 국가정책으로 내세울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를 비롯한 반공국가 대한민국의 모든 대통령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재자 소리를 듣게 될 운명이었다. 특히 이승만의 경우는, 그가 없었더라면 남한은 공산화되고 따라서 통일이 되었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더욱 더 독재자의 누명을 쓰게 된 것이다.  
       이승만을 독재자로 모는 문제에 있어서 고려되어야 할 또 하나의 사항은 국회를 중심으로한 야당 세력의 극한투쟁 양식이다. 자신들을 정의의 사도로 행세하며 무조건 반대와 극한투쟁에 호소하는 관행은 후진국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그렇다 해도 한국 야당의 그 정도는 너무 심하다. 그러한 행태의 뿌리는 조선 시대 유생들이 목숨을 걸 듯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왕에게 상소하던 전통적 구습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1958년의 국가보안법 파동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야당은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극단투쟁을 벌였지만, 투표를 못하게 방해하는 민주주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야당의 투쟁 특성은 여·야 중재에 나섰던 미국 대사 다울링마저도 개탄하며 지적할 정도였다. 다울링은 특히 민주당 신파의 비타협성에 실망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적 파행은 그 책임을 전적으로 이승만에게만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주주의 장애물 지역주의를 초월한 대통령

       이승만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살피는 데 있어서 고려해야할 또 하나의 사항은 지역주의 문제이다. 국민 개개인의 공정한 투표를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 정신은 맹목적인 충성심을 요구하는 지역주의가 지배하는 풍토에서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이승만은 유일하게 지역을 모르는 지도자였다. 태어난 곳은 황해도였지만, 두 살 때 서울로 왔기 때문에, 그는 서울 사람이었다. 그러나 서울은 전국적인 성격의 도시였고, 실상 그에게는 고향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지역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 그 자체였다.
       그 때문에 그의 통치기에는 정치적으로 지역 차별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전남 광양출신의 조재천이 대구에서 경북지사와 3,4,5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부산 출신의 강성주가 목포에서, 그리고 경남 산청 출신의 이필호가 전남 광주에서 3,4,5대 국회의원을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4.19직후에 실시된 7.29총선에서도 경북출신의 엄민영이 전북에 참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지역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그는 지역이나 계급 같은 작은 문제 보다는 ‘문명’, 또는 ‘생활방식’이라는 보다 더 큰 문제의 관점에서 보는 넓은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의 주된 관심은 한국사회가 중국 중심의 ‘대륙문명권’에 그대로 남아 있느냐 아니면 미국 중심의 ‘해양문명권’에 새로이 편입되느냐 하는 문제에 놓여 있었다. 더구나 지역이나 계급 같은 문제는 그가 구한말 타도의 대상으로 투쟁했던 케케묵은 요소였기에 그런 문제에는 관심자체가 없었다.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같은 현대국가를 만들고자 몸부림친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해양문명권’에 속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러한 목적에 필요한 인재라면 누구든지 등용했다.
       둘째로 그는 국가 생존장치로서 ‘동맹’의 확보 문제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주의를 초월했다. 국제정치를 잘 아는 이승만으로서는 약소국이 독립을 유지할 동맹국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동맹국은 “영토적 야심”이 없어야 했다. 그는 미국을 적합한 강대국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미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한다는 문제에 비하면 지역이나 계급의 문제는 사소한 것이었다.
       셋째로 그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자였다. 낡은 왕실과 부패한 양반계급의 전횡으로 대한제국이 강대국들의 희생물이 된 것을 뼈저리게 체험하면서 ’백성이 유능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신념을 신앙처럼 다진 이승만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유능한 인재’ 뿐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승만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독재적인 대통령이 아니었다. 많은 흠결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근본적으로 자유선거의 기본 틀을 양보하지 않은 자유민주주의자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민주주의 핵심 제도인 대통령 직선제를 처음 도입한 민주혁명가라고 할 수 있다. 그 제도의 도입은 1987년의 이른바 ‘6·29 선언’의 대통령 직선제 발표가 나오기 35년전인 1952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는 이승만 통치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그동안 벌어졌던 ‘민주화’ 투쟁들의 목표는 언제나 ‘대통령 직선제’였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이 만들고 지켜왔던 ‘직선제 헌법’이야말로 공산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정치적 자유를 담보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4.19, 6.10등 국민들의 궐기도 결국은 ‘이승만 헌법’을 제대로 실행하자는 요구의 폭발이었다.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는 이승만이 만들어 놓은 틀을 경제성장과 문화향상에 따라 고급화하고 세련화한 것일 뿐이다. 모든 정치투쟁과 혼란의 소용돌이는 이승만의 자유주의 울타리 안에서 벌어진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