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피숍 안으로 들어선 하주연이 안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김민성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

    오후 3시. 방학중이어서 학교 앞 거리는 한산했다. 커피숍에도 손님은 두 테이블이 더 있을 뿐이다.

    다가온 하주연이 앞쪽 자리에 앉더니 눈웃음을 치며 묻는다.
    「요즘 두문불출 한다며? 지선이한테서 다 들었어.」
    「두문불출이라니? 야, 동네 도서관 나간다.」

    하주연을 훑어 본 김민성의 가슴이 왠지 허전해진다.
    종업원에게 음료수를 시킨 하주연이 지그시 김민성을 보았다. 

    「형, 지선이가 이야기 했지?」
    「뭘?」
    했지만 김민성은 눈치를 챈다.

    그 703호 놈과의 사연이다. 그 법석을 떨고나서 다시 기어들어간 자신의 꼴이 부끄러웠겠지. 그래서 변명꺼리라도 장만해 놓은 것인가? 나를 안만나고 안면 몰수해도 될텐데도 그런다.

    그때 하주연이 말했다.
    「그놈하고 어제 헤어졌어.」

    어제였군. 나는 잠자코 시선을 준채로 다음 말을 기다리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왜 나한테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나한테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언감생심 해본 적이 없다. 꿈 깨라다.

    나는 스물다섯, 군에까지 가서 「썩고」 나왔다. 전(前) 대통령이 「군에서 썩고 나왔다」는 표현을 하고나서 구설수에 올랐지만 받아들이는 세대에 따라서 전혀 다른 해석을 한다. 나는 그 「썩고」라는 표현을 「단련」「노련해짐」「경험닦음」「문대기」 등으로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축에 든다. 「공백」「좌절」「감금」「매장」 등으로 극단적 해석을 하는 양반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하주연이 말을 이었다.
    「모른척하고 몇 번 만났더니 슬슬 나하고 동해안에 같이 놀러간 남자가 궁금해진 모양이야.」
    「......」
    「내 옆에 남자가 있다는걸 알고나서부터 매달리기 시작하더구만. 그 양선화란 기집애하고는 끊어진 것 같고.」
    「......」
    「그러다 어제 그랬어. 날 사랑한다고. 너밖에 없다고. 지 마음이 이렇게 순수해진건 처음이래나? 어쨌든 사설이 길었어.」

    그리고는 하주연이 빙그레 웃었다. 생기 띤 두 눈이 반짝이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 이젠 헤어질 때가 되었다구. 가장 좋을 때 헤어지자구. 그동안 고맙고 즐거웠다구.」

    그러자 심호흡을 하고난 김민성이 물었다.
    「그랬더니 울디?」
    「갑자기 한 대 맞은 것 같은 얼굴이었어.」
    「그리고?」
    「그냥 입만 딱 벌리고 있길래 일어나 나왔지.」
    「멋지게 헤어졌구만.」
    「근데, 형 얼굴은 시큰둥하네?」
    하고 하주연이 물었으므로 김민성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고나서 말했다.

    「그야 나하고 상관없는 사건이니깐 그렇지. 재밌긴 했어.」
    「왜 상관이 없어?」
    어느덧 정색한 하주연이 똑바로 김민성을 보았다.
    「내가 형한테 이딴 보고를 하는 이유를 모른단말야? 형이 있으니까 내가 헤어질 용기가 나왔다는걸 모르겠어?」

    김민성도 이제는 입만 딱 벌렸다. 기가막히긴 했지만 말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