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개의 통치자들은 측근 실세들의 농간에 빠지면서 사리의 판단에 어두워진다. 실정을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사마광(司馬光:자치통감의 저자)은 실세들의 방자함과 무능한 군왕과의 함수관계를 아주 절묘하게 설파하였다.

                -임금의 근심은 신하의 간사한 것을 알지 못하는 데에 있으니, 만약에 알고서 다시 용서해 주면 알지 못하고 있는 것보다 못하다.

                 광해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등에 업은 이이첨(李爾瞻: 1560~1623년)은  군왕의 모후를 폐하여 서궁(西宮:지금의 덕수궁)에 가두고, 어린 왕자를 쩌서 죽이는 난정을 주도하였다.
    참다못한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17년)는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이첨을 탄핵하는 것은 곧 광해군의 우매함을 질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목숨을 버릴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 임금의 위엄과 권위를 제 마음대로 논간 하는 것을 남의 신하로서는 극악한 대죄인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는 빨리 권세를 가진 권간(權奸)을 내쫒아 종묘사직을 편안케 하시고 다음으로 삼사의 무리들이 저지른 악죄를 다스리소서. 종사가 행복하면 신하와 백성도 행복합니다.
       
                      문인 정치가 고산 윤선도의 뼈아픈 직언은 이이첨에게만 미친것이 아니다. 현종 1년(1660) 4월, 이른바 ‘예송(禮訟)’이라고 불리는 길고도 지루한 예론(禮論) 싸움에서도 효종의 사부이자 조선 유학의 거벽과도 같은 우암 송시열을 극렬하게 탄핵하였다. 당시 우암 송시열을 탄핵하는 것은 지식인 사회에서 매장될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신이 견묘의 충정을 이기기 못하여 오직 군부와 종묘사직이 자신이 있음을 생각지 않았기에 시대의 저촉을 범해가면서 바른말을 올리는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사람으로 하여 말까지 폐기하지는 마소서. 신은 이 상소가 받아들여지느냐 않느냐와, 이대로 실현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주세(主勢)가 굳건하고 못하는 여부와, 나라의 명운이 연장되고 안 되는 여부를 점칠 것입니다.
                                                                           현종 1년 4월 18일조 <실록>

                  고산 윤선도는 지난날 이이첨을 통박하듯 조선 유학의 종주와도 같았던 송시열을 왕조의 종통과 적통을 혼란케 하여 국가를 위급하게 하였다고 맹공 한다.

                  -아아, 선조(先朝)로부터 믿고 의지하고 위임한 것이 양송(兩宋:송시열, 송준길)같은 이가 없사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선왕을 보도(輔導)하지 못하여 불행한 변이 있게까지 하고, 재궁을 쓸 수 없게 한 일까지 있었으니 이것은 만고에 없는 국가의 큰 변이었사옵니다. 인산(因山)은 마지막으로 보내드리는 큰 절차인데, 그 극히 길한 땅을 버리고 결점 있는 자리에 모시었으니, 이것은 장지를 택정하여 편안히 모시는 도리가 아니었사옵니다.

                      이때 윤선도의 나이 74세였으니, 그 나이에 걸맞지 않는 과격한 상소문이 초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문인(文人) 정치가였기에 밝고 맑은 문학정신의 잣대로 어두운 현실 정치를 성찰하였음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대소신료들은 입을 모아 윤선도를 처단할 것을 주청하고 나선다. 현종은 그 벌 떼 같은 신료들의 강청을 물리칠 수가 없다. 결국 윤선도는 삼수로 귀양을 떠나게 된다. 도성을 떠나는 늙은 시인을 우윤(右尹) 권시(權 시)가 멀리까지 따라가 배웅하면서 물었다. 
    “심중은 충분히 짐작하옵니다만, 너무 과격한 언사를 쓰지 않으셨습니까. 노구에 북변 한지의 유배생활을 어찌 견디려 하십니까.”
                     차라리 부러질지언정 휘어질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으로 평생을 살아온 노시인 윤선도의 얼굴에 아주 편안한 웃음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이미 늙었으니 따뜻한 곳인들 특별히 즐거울 것 없고, 춥고 험한 곳인들 유별나게 괴로운 것도 없을 터…, 나와 같은 사람이나 이런 말을 하지 또 뉘라서 하겠는가. 내 한 몸의 화를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그런 언사를 쓴 까닭은 모두 주상전하를 위해서이네. 보령 스물인 주상전하의 어의를 송시열 등이 좌지우지하니, 이대로야 종사가 제대로 되겠는가. 내 보잘 것 없는 상소가 우암을 내쫒지는 못하더라도, 경계하는 뜻은 충분했을 것이네.
                                                                                 <연려실기술> 현종1년 조

                       아, 얼마나 아름다운 참 선비의 모습인가.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험지로 귀양을 가면서도 ‘내 보잘 것 없는 상소가 우암을 내쫒지는 못하더라도, 경계하는 뜻은 충분했을 것이네’ 라고 말한 대목은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지식인 윤선도의 진면목임이 분명하다.

                       ‘오우가(五友歌’와 같은 지조가 담긴 걸작을 남기면서 우리 국문학사를 장식한 고산 윤선도는 정치 일선에서 활약한 고위관직이면서도 자신의 고고한 문학정신을 지켜나갔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글을 쓰는 선비란 나라의 밝은 명운을 위해서는 사태의 완벽한 해결이 아니더라도 자기희생을 통하여 경계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 모범이 후대를 사는 지식인들에게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