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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방안 사회주의자'라는 표현 말이지요. 사회주의야 뭐 다 아는 얘길 테고 '방안'이라는 표현이 의문이 들 텐데, 일종의 지기기만 안에 갇힌, 폐쇄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백낙청이 바로 '방안 사회주의자'의 전형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
- ▲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연합뉴스
백낙청은 부자집 귀공자님이지요. 부모의 돈으로 유학을 갔다오고, 자기 식의 세상을 보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그게 사회주의일텐데, 제3세계 부자집 귀공자님이 빠지기에 딱 알맞은 세계관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부자집 귀공자님이라는 위치에서 드러나듯 백낙청에게는 현실은 없고, 즉 현장의 삶은 없고 이데올로기와 이념에 굴절된 자기만의 현실이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입니다. 삶은 없고 이념만 있는 것, 부자집 귀공자님이 가질 수 있는 삶 가운데의 개중 나은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좀 고상한 삶 말이지요. 부의 노예이기 싫다는 어떤 자존심이 부자집 귀공자님을 이런 삶으로 내어몰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이게 부자집 귀공자님이 선택할 수 있는 좀 고상한 삶이긴 하지만 이건 더욱 더 치명적일 수도 있는 일입니다. 고상함 이면에는 여전히 부자집귀공자님이 있기 때문입니다.백낙청이 또 엉뚱한 소리를 했더군요. 김정일의 제2차 핵실험은 MB 탓이고 시민사회단체들은 지금이야말 정치투쟁을 하여야 한다고요. 김정일의 제2차 핵실험이 MB 탓이라면 김정일의 제1차 핵실험은 누구 탓인가요. 김대중 탓인가요 노무현 탓인가요.
탓타령을 하는 백낙청을 보면 지나치게 유아적이요, 고상함 넘어 부자집 귀공자님으로 회귀했다는 느낌입니다. 탓타령이란 일종의 말장난입니다. 언어와 학문을 가지고 이런 말장난을 일삼는다면, 이는 큰 죄악입니다.
본인도 함 탓타령을 해보자면 김정일의 제1,2차 핵실험은 백낙청류의 친북좌파 때문이라는 판단입니다. 김정일이 이것들 친북좌파들을 위해서, 이것들을 보호하고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확인하기 위해서 핵무기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김정일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그건 김정일 자신의 탓이 아니고 다 미국탓, MB탓이라고 하는 것은 유치함 이상의 유치함입니다. 이는 말장난이요, 어쩜 이도 훨 넘어선 일종의 종교라 하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겠습니다. 백낙청은 언어와 학문을 남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자집 귀공자님 인생관에 갇혀 세상을 타락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더욱 중요한 것인데, 백낙청은 시민사회단체를 향해 지금이야말로 정치투쟁에 매진해야 할 때라고 하였는데 이런 인식구조가 한국문화, 특히는 한국문학을 망쳐놓은 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백낙청은 '창작과비평'이라는 문예지의 소유자인데 이 문예지를 통해 정치투쟁을 하였지요. 다시말해 문학을 통해 정치투쟁을 하였다는 건데 문학을 정치투쟁의 도구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창비가 지난 30여년 동안 해 온 일이 이것입니다. 문학을 정치투쟁의 도구화하기.
정치투쟁의 도구로 전락한 문화 내지는 문학은 문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난 30여년의 세월 동안 '창비'가 이런 짓을 해 온 결과, 현재 한국사회에서 한국문학의 주류는, 정치도구화된 문학입니다. 정치도구화된 문학이 아니면 문학으로 안 보는 인식이 사회전반에 저변으로 깔려 있습니다. 문학이 아닌 게 문학으로 통용되는 사회, 한국사회의 참모습입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현재 한국사회에 문화 내지는 문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치투쟁의 도구로 전락한 문학, 정치의 하위범주로써의 문학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백낙청이나 창비가 우리 문화계 전반에 걸쳐 지니고 있는 영향력이나 위상을 감안할 때 별반 틀린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백낙청이 지금이야말로 시민사회단체가 정치투쟁에 매진해야 할 때라고 하였는데, '지금'이라는 말은 지나친 선동이라는 느낌입니다. 여태까지 올바른 문화관을 정립하지 않은 채 정치투쟁의 하위범주로써 도구화시켜놓고서는 또 지금이야말로 정치투쟁을 위한 도구로 나서야 한다는 것은, 한국사회의 모든 문화 모든 시민사회단체를 문화 없는 문화 시민 없는 단체로 죽여버리겠다는 심뽀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백낙청은 평생을 정치투쟁을 선동해 온 인물인데, 특별히 문화면에서 그러한데, 새삼스럽게 '지금'을 강조하는 것은 수사법상의 강조법인가요, 노추의 지나친 욕심을 반영하는 일인가요.
어떤 인간의 추잡한 영혼을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은 기분 씁스레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백낙청 같은 백면서생, 부자집 귀공자님에게도 영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추잡함이 느껴진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뉴데일리 시민논설위원 '자유야'님의 칼럼입니다. 외부필진 및 시민논설위원의 글은 뉴데일리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