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 뉴데일리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 뉴데일리

    오늘 他界(타계)한 金大中 前대통령(만 86)은 파란만장한 生涯(생애)를 살았다. 그의 생애는 4期로 나눌 수 있다. 1. 좌익활동가 시절(해방 직후) 2. 야당정치인 3. 대통령 4. 전직 대통령.
     
    그의 활동을 네 가지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1. 좌익 활동가 2. 야당투사 3. 대통령 4. 6·15선언자. 그의 생애는 2000년 6·15선언 前後로 크게 나뉘어진다. 6·15선언 이전의 故 김대중씨는 민주투사로 불렸다. 6·15선언 이후의 김대중씨는 지지자에 의하여서는 평화의 使徒(사도), 반대자에 의하여서는 反헌법·反국가적 행위자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생애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서는 6·15선언이 될 것이다.
     
     1. 6·15선언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왔는가, 아니면 핵폭탄을 가져왔는가.
     2. 6·15선언이 한민족의 통합을 가져왔는가, 분열을 가져왔는가.
     3. 6·15선언이 자유민주 체제를 강화시켰는가, 약화시켰는가.
     4. 6·15선언이 韓美(한미)동맹을 강화시켰는가, 약화시켰는가.
     5. 6·15선언이 북한 동포·국군포로의 인권을 향상시켰는가, 약화시켰는가.
     6. 6·15선언이 헌법의 敵(적)을 강화시켰는가, 약화시켰는가.
     7. 6·15선언이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증진시켰는가, 후퇴시켰는가.
     
    이상 일곱 개의 평가기준을 적용하면 故 김대중씨의 역사적 位相(위상)이 대충 설정될 것이다. 
     
    故人은 朴正熙·全斗煥 정권에 맨주먹으로 맞섰던 사람이다. 박정희 정권에 의하여 납치·투옥되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선 사형선고를 받고 연금도 당했다. 
     
    그는 그런 불굴의 용기를 稀代(희대)의 학살자 김정일 앞에서는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700만 인명의 학살에 책임이 있는 김정일과 손을 잡고 연합제·연방제 혼합 통일 방안에 합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한 合法 정통국가인 대한민국을 反(반)국가단체인 북한 정권과 同格(동격)으로 놓는 치명적 과오를 범하였다. 그리하여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희대의 학살 독재자와 同格으로 평가받거나 동격으로 이미지 메이킹되는(특히 영상을 통하여) 사태를 自招(자초)하고 말았다. 그는 박정희에 의한 유신선포 직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북한 정권의 조종을 받는 在日(재일)인사들과 손잡고 反(반)국가단체인 韓民統(한민통)을 만들었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은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故 김대중씨는 李承晩(이승만)과 함께 大衆(대중)을 권력의 기초로 보았던 대중정치인이다. 이승만은 대중을 계몽·교육함으로써 한민족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김대중씨는 계몽보다는 선동적 설득을 더 앞세웠다는 비판이 강하다. 
     
    김대중씨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가 추구했던 민주주의가 어떤 민주주의였냐에 의하여 대충 결정될 것이다.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그리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 촛불난동과 같은 법치파괴, 6·15선언과 같은 헌법파괴까지도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설명하곤 하였다. 권력을 잡은 이후의 이러한 그의 민주주의觀(관) 때문에 민주투사로서의 그의 역할까지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 내가 만난 한 전직 미국고관은 "국제사회에서 김대중 씨의 영향력을 능가하는 한국 사람은 이승만·박정희뿐일 것"이라 평했다. 그의 죽음은 한국 현대사의 한 章(장)이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장의 역사에서 그는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