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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인생을 바꾼 옥중생활 5년 7개월

입력 2009-08-13 16:29 수정 2009-09-21 09:47

감옥에서 정치이념-국가철학이 완성되었다

독립협회의 총대의원으로 왕정개혁을 앞장서서 부르짖던 이승만은 고종황제의 폐위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24세가 되는 1899년 1월9일부터 1904년 8월7일까지 한성감옥에 갇혀있던 이승만에게 5년7개월의 세월은 인생의 대전환점이 되었다.
첫째는 완전한 기독교인이 된 것이고, 둘째는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하면서 그의 정치이념과 국가철학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또한 수감된 동지들과 함께 옥중학교와 서적실을 개설 운영하였고 수많은 신문 논설을 쓰고 한영사전 편찬도 시도했으며, 엄청난 독서와 번역까지 하였다.

▲ 배재학당 졸업직후 23세 이승만이 1898년 4월 9일 창간한 한국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 뉴데일리

모진 고문속 첫 기도 "주여, 이 나라를 구하소서"

*기독교 개종과 전도
손목엔 수갑, 발목엔 족쇄, 목에는 무거운 나무 칼을 쓴채, 조만간 처형될지도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미결수 이승만. 모진 고문과 곤장을 맞으며 고통과 통한 속에서 차입된 신약성서를 읽던 어느 날 그는 기독교도가 되기로 결심한다.
“나는 감방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면 성경을 읽었다. 배재학교 다닐 때는 그 책이 아무 의미가 없었는데 어느 날 선교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해주신다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평생 처음으로 감방에서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주옵소서!“ 기도했다. 그랬더니 금방 감방이 환한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변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에 대해 갖고 있던 증오감, 불신감이 사라졌다.” (이승만: 투옥경위서)
이승만은 그때까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을 병탄하려는 목적으로 침투한 미국정부 앞잡이(agents)로 간주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1년전인 1898년 미국이 하와이를 병탄했을 때, 선교사들이 먼저 원주민을 개종시킨 뒤 미국군사들이 하와이 여왕을 폐위 시켰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똑 같은 계획을 수행하는 줄 여겼던 것이다.
일단 기독교에 귀의한 이승만은 성경을 몰래 읽으면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게 가지게 되었으며, 옥중의 이상재, 유성준 이원긍등 양반출신 고관들과 간수장까지 무려 40여명이나 개종시켰다.

'淸日戰記'등 번역...신문논설 75편 써내...영한사전 편찬중 '독립정신' 집필

*영어공부, 번역과 저술

▲ 고종 폐위 공화정 음모 혐의로 종신형을 받고 한성감옥서 지내던 '죄수복 이승만' ⓒ 뉴데일리


감방에는 죄수들이 항아리를 갖는 것은 허용되었다. 이승만은 그 항아리를 눕히고 들어가 촛불을 키고 공부했다. 선교사들이 들여보내는 영어책과 잡지들을 읽으면서 문장들을 외웠고, 일영(日英)사전의 영어단어를 몽땅 외웠다. 과거시험 공부할 때 한문서적을 암기했던 방법이었다. 종교서적은 물론 국제법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고, 엄청난 독서목록 중에 청일전쟁사인 ‘청일전기’ ‘만국사략’ ‘주복문답’ ‘감리교역사’ ‘기초영문법’등을 번역했다. 시집 ‘체역집’과 ‘산술’책도 썼다.
한국인 최초로 ‘영한사전’을 편찬하던 중에 러-일전쟁 발발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이승만은 아깝게도 이 사전을 중단하고 ‘독립정신’을 쓰기 시작했다. (관련기사 XX면)
투옥전에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 ‘매일신문’을 창간했고 ‘뎨국신문’의 편집인이었던 이승만은
옥중에서 75편이나 논설을 써서 기고했다.

"서양에도 없는 일 한다" 선교사들 서적-식품 지원

*옥중학당 개설
이승만은 한성감옥서장 김영선에게 ‘옥중학당’ 개설을 탄원했다. 감동한 김영선은 학당운영을 허락했을 뿐만아니라 문필도구를 돕고 옥리들로부터 의연금을 거둬 지원해주었다.
1902년부터 각 칸에 있는 아이들 수십명을 모아 영어, 일어, 산수, 세계지리등을 가르치고,
어른 죄수반을 신학문과 성경을 가르쳤다. 선교사들은 “서양의 개명한 나라에도 없는 일을 한다”고 기뻐하면서 서적과 식품을 계속 도왔다.

세계사-국제법등 1년반동안 대출도서 2020권

*서적실 개설
“서적실을 설시(設始)하야 죄수들로 하여금 임의로 책을 읽어보게 하려함에 성서공회에서 기꺼이 찬조하야 지폐50원을 허락함에 책장을 만들고 서책을 수집함에, 심지어 일본과 상해의 외국선교사들이 듣고 서책을 보내는 자 무수한 지라......”
‘감옥서 도서대출부’에 의하면, 1903년1월부터 1904년 8월까지 한번 이상 책을 빌려 본 사람은 229명, 대출도서는 2,020권이었다.
순한글 도서가 52종, 한문도서가 223종으로 세계사, 세계지리, 국제법에 관련된 서적들이 많고 청나라 말기 개혁운동 관련 책들이 다수였다.

숨져가는 죄수들 끌어안고 간호..."나 홀로 무사하다니..."

*콜레라 환자 구호
“......작년 가을 괴질이 옥중에 먼저 들어와 4,5일동안에 60여명을 목전에서 쓸어 내릴 새, 심할때는 하루에 열일곱 목숨이 눈 앞에서 쓸어질 때에 죽는 자와 호흡을 상통하며 그 수족과 몸을 만져 곧 시신과 함께 섞여 지내었으되 홀로 무사히 넘기고 이런 기회를 당하며 복음 말씀을 가르치매 기쁨을 이기 못할 지라......”
이승만은 옥중에서 희생적으로 콜레라 환자 구호운동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굳힐 수 있었고, 동시에 많은 죄수들과 그 가족들에게 종교적 감화를 끼쳤다.

漢詩로도 정치외교 강조...시집-서예집도

*불글씨와 한시 짓기
‘우남 이승만박사 서집’(1990)에 실린 휘호들이 보여주듯이 이승만은 서예에 뛰어났다.
“.....붓글씨를 쓰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며 근육의 긴장을 푸는 데도 도움이 된다.....훌륭한 학자가 구비해야 할 요건으로서 서예가를 만들려고 했던 부모님에 대한 의무감에서 붓글씨를 시작했다. 간수들의 회의로 붓과 잉크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을 때 이것이 서예의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나의 손가락 셋이 굳어져 내 손을 망쳐 불구화되었다.”
손가락을 망칠 정도로 서예를 연습한 이승만은 죄수들중에 한시(漢詩) 동호인들을 찾아내어 함께 시를 지었는데 한시집 ‘체역집’에 100여수가 담겨있다.
   옥중세모(獄中歲暮)
밤마다 긴 긴 사연 닭이 울도록
이 해도 거의로다 집이 그리워
사람은 벌레처럼 구먹에 살고
세월은 시냇물처럼 따라가누나
어버이께 설술을 올려보곺아
솜옷을 부쳐준 아내 보곺아
투옥되기 8년전 열여섯살에 동갑내기 박씨와 결혼한 이승만은 아내를 그리는 시도 썼고, 1년 전에 태어난 외아들 봉수(아명 태산)에 대한 애틋함을 관습대로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부친을 위한 시에다 한줄 덧붙인 것도 있다. (훗날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버지에게 보내졌던 이 7대독자는 1906년 디프테리아에 걸려 필라델피아에서 9살에 숨지고 말았다.)
그는 정치 시도 썼는데 시에서도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치의 급무는 외교에 있고
   일이랑 능한 분께 물어 보소
   외로우면 나라가 위태롭다오
   자유로써 백성을 인도합세다
   그릇된 예법은 선 듯 고치고
   신식도 좋으면 받아 들이소

                                 ---유영익 저 <젊은 날의 이승만>(2002)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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