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천에서 감자와 옥수수가 왔다.
    동혁이네가 보냈다.
    ‘동혁이네’라면 안 된다. ‘고 박동혁 병장 부모’라는 표현이 맞다.
    동혁이 부모를 기자는 ‘형님’과 ‘형수님’으로 부른다. 그래서 ‘동혁이네’다.
    지난 5월 제2차 연평해전 특집 취재를 위해 동혁이네를 홍천에서 처음 만났다.
    소 다섯 마리, 고양이 한 마리와 사는 컨테이너 구석방에서 입대 전 말끔하게 생긴 동혁이 사진도 그때 보았다.
    이 잘생긴 청년은 제2차 연평해전에서 전사했다.
    의무병으로 동료를 돌보다, 그리고 총 들고 적에게 사격을 하다 숨졌다.
    화장 후에 몸에서 나온 파편이 3㎏이었다.
    기대도 크던 큰 아들 가슴에 묻고 사는 동혁이 부모는 말을 아꼈다.
    한번 기자 만나면 애써 지운 아픔 되살아나 한 달은 가슴앓이를 해야 한다고 했다.
    같이 점심을 하며 반주로 소주 한 병씩 나눴다.
    자식 잃은 아픔보다, 자식이 지키려한 가치를 국가가 부정해 원망스럽다는 얘기를 했다.
    대통령이 나서서 ‘NLL 별 것 아니다’라는 세상.
    ‘그 NLL 지키다 숨진 우리 아들은 그럼 뭐냐’며 아버지는 술잔을 털었다.
    홍천 산골의 컨테이너 집은 이들에게 원망스런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였다.
    한번은 형수에게 “왜 힘들게 소를 다섯 마리나 키우냐”고 물었다.
    그나마 일을 안 하면 잡생각이 많아 못 견딘다고 했다.
    아들 생각, 원망스런 세상 잊으려 가꾼 감자와 옥수수를 보며 마음이 아려왔다.
    감자를 먹을 때마다 그럴 것 같다.

    지난 일요일 저녁식사는 김종선씨와 같이 했다.
    역시 제2연평해전 유족이다. 그녀의 남편 고 한상국 중사는 전투 뒤 41일 만에 인양된 참수리 357정 기관실에서 발견됐다. 함정의 키를 꼭 잡은 모습으로. 그때가 결혼 6개월째였다던가? 그녀가 지난 7일부터 전쟁기념관에서 일하게 됐다고 알려왔다. 그래서 마련한 취업 축하 자리였다.
    일은 힘들지 않다고 했다. 모두 잘해준다고, 자리 마련해준 보훈처에도 고맙다고 했다.
    그리곤 뜻밖의 얘기도 했다.
    “오빠. 전쟁기념관 찾은 분들이 저를 알아보고 격려해주세요.”
    이 친구는 기자를 오빠라고 부른다.
    그녀가 유명인사이긴 하다. 남편을 잃은 뒤 정부나 사회가 하는 짓이 너무 어처구니 없어 “대한민국은 나라도 아니다”라며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돌아왔다. 그래서 소위 매스컴도 많이 탔다.
    “유명 인사니까?”라는 농담반 진담반 대답에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손 꼭 잡아주시며 열심히 살라는 분도 계시고요, 보스턴에 사시는 한 교포 분은 ‘미안하다’라시며 용돈을 주시는데 사양하느라 혼났어요.”
    순간 가슴이 찡해왔다.
    ‘미안하다’라고? 그래. 바로 이거였구나. 이들을 볼 때마다 뭔가 꼭 해야 할 한마디가 있었는데 바로 ‘미안하다’였구나. ‘미안하다’ ‘미안하다’….

    굴절의 10년은 우리가 미안해야 할 사람들은 많이도 만들어냈다. 어찌 이들 2차 연평해전 유족들뿐이겠는가? 나라의, 역사의 정통성이 외면당한 동안 우리가 미안해야할 사람들은 수없이 만들어졌다.
    이들을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잊고 살았다.
    그보다 더 큰 일은 우리도 모르게 씌워진 색안경에 미안함조차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경우도 그렇다.

    ‘미안하다’고 말해야할 사람을 하나하나 찾아야 한다. 그래서 상처 보듬어주고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할 자리에 있게 해야 한다. 기운 나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