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할 일이 생긴 겁니다". 지난 11일 태국 파타야에서 돌아오는 기내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이같이 말했다. 오는 6월 제주도에서 열리는 한·아세안(ASEAN, 동남아국가연합) 특별정상회의에 대비하자는 말이다. 태국 반정부 시위로 인해 한·아세안 정상회의,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일정이 연기된 탓에 조기 귀국하면서다. 올해 초 이 대통령이 천명한 '신(新)아시아 외교 구상'을 아세안 무대에서 구체화할 기회가 무산됐지만, 오히려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한다는 '긍정의 메시지'다. 이 대통령은 밝은 표정이었다.

    예기치 못한 사건 발생으로 당초 잡혀있던 2박 3일간의 일정은 완전히 헝클어져버렸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예정에 없던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와의 면담을 가졌고, 아소 타로(麻生太郞) 일본 총리와의 한·일 정상회담, 그리고 한·중·일 3개국 정상회담 시간을 긴급히 조정해 내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일․중 정상과의 연쇄 회담을 통해 이 대통령은 아세안과의 회의 취소에 따른 3국간 공조방안을 도출해 냈다.

    이 대통령은 특히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3국 정상은 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해 북한에 단합되고 강력한 메시지를 조속히 보내야 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중국과 일본이 북한에 대한 유엔안보리의 대응 강도를 놓고 이견을 보여왔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부여됐다. 이 대통령은 또 한일정상회담에서 최근 역사교과서 논란 등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도 짚고 넘어갔다. 1박 2일 동안 급박했던 순간을 이 대통령을 수행했던 청와대 관계자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되돌아 본다.

  • ▲ 태국 파타야에서 11일 개최될 예정이었던 '아세안(ASEAN, 동남아국가연합)+3 정상회의'가 반정부시위로 인해 무산됐다. 붉은 색 티셔츠와 머리띠를 두른 시위대가 '비치로드(Beach Road)'변에 게양된 참가국 국기를 지나 회의장인 로열 클리프 호텔로 이동하고 있다. ⓒ 뉴데일리 이길호 기자[=태국 파타야]
    ▲ 태국 파타야에서 11일 개최될 예정이었던 '아세안(ASEAN, 동남아국가연합)+3 정상회의'가 반정부시위로 인해 무산됐다. 붉은 색 티셔츠와 머리띠를 두른 시위대가 '비치로드(Beach Road)'변에 게양된 참가국 국기를 지나 회의장인 로열 클리프 호텔로 이동하고 있다. ⓒ 뉴데일리 이길호 기자[=태국 파타야]

    10일 오후 5시 15분(태국 현지시각). 이 대통령과 수행단은 태국 순방 첫 일정인 한·태국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로열 클리프 그랜드 호텔에 들어섰다. '불안한' 분위기가 처음 감지된 것이 이 때. 이 대통령이 탑승한 차량이 호텔 정문 앞에 도착하기 전 잠시 멈칫하는 장면이 목격됐다. 국가 정상을 태운 차량이 멈춰선다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의전상 흔치 않은 일이다

    청정에너지 등 녹색성장 분야에서 양국 협력을 약속한 아피시트 웨차치와 태국 총리와의 정상회담 이후 또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이 대통령 일행은 곧바로 회담장을 떠나 다음 일정이 기다리고 있던 숙소호텔로 이동할 수 없었다.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를 지지하는 단체인 '독재저항 민주주의 연합전선(UDD)'이 이끄는 시위대가 호텔 주변을 봉쇄했기 때문.

    당황한 것은 태국 정부뿐 아니라 우리측 수행단도 마찬가지였다. 유명환 외교통상부장관, 김성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은 긴급히 사태 파악에 나섰다. 그런데 정작 이 대통령은 "로비로 가서 차 한잔 마시며 기다리자"면서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이 대통령은 "(태국측에 상황을) 알아보지 말라. 저 사람들 안 그래도 미안해하는데 더 미안할테니 그러지 말라"면서 바짝 긴장한 수행단을 다독였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아마 권위의식이 강한 대통령이었으면 우린 내내 안절부절 했을 것"이라며 당시를 돌이켰다.

    11일 오전 8시경 한·아세안 정상회의와 각국 정상들과의 양자회담 등 이날 일정을 점검하고 있던 이 대통령 앞에 유 장관이 급히 달려왔다. "오전 7시부터 열리기로 했던 한·중·일 3국 외무장관회의에 일본 측이 시위대로 인해 참석하지 못했으며 한·중 장관회의만 이뤄졌다"는 보고였다. 새벽부터 시작된 호텔 주위의 반정부 구호와 호루라기 소리를 이 대통령은 잠시 생각했다.

    이 대통령은 참모진에게 "한·아세안 정상회의가 잘 안될 것 같다. 못할 지도 모르겠다"며 다음 단계 준비를 언급했다. 원자바오 총리와의 면담, 한·일 정상회담, 한·중·일 정상회담을 앞당겨 개최할 수 있도록 그 가능성에 대비하라는 뜻이었다. 한 참모는 "이 대통령의 순발력과 위기관리능력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면서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음 수순을 준비하는 모습에 '큰 지도자'로서 면모가 돋보였다"고 전했다.

    오전 9시 15분. 중·아세안 정상회의가 열릴 시간이었지만 이 대통령과 같은 호텔에 묵고 있던 원자바오 총리가 출발조차 못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대통령은 "안되겠다. 한․일 정상회담, 한·중·일 정상회의 일정을 앞당기고, 원자바오 총리와의 면담을 주선하라"고 지시했다.

    우리측 주도로 한·중·일 외무장관은  전화통화를 통해 긴밀한 협의가 진행됐고 한·중. 한·일. 한·중·일 정상회담 순으로 일정이 마련됐다. 무산 위기에 처했던 정상회의가 이 대통령의 제안으로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일정에 차질을 빚어 막막한 상태였던 중국과 일본으로서도 흔쾌히 동의해 왔다 

    한·중·일 정상회의는 내용면에서도 실용적 성과를 거뒀다. 이 대통령은 북한 로켓 도발에 대한 유엔안보리의 대응책을 놓고 현저한 시각차를 보이던 중국과 일본의 입장 차이를 원만하게 조정하여 3국이 한목소리를 내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일본은 유엔 안보리 결의 1718호에 위배되는 만큼 강도 높은 추가제재가 필요하다는 입장인 반면, 중국은 인공위성 발사라는 주장을 들어 난색을 표명해왔다.

    실제 3국 정상회담에서도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이냐 결의안 채택이냐 등 북한에 대한 제재수위와 형식을 놓고 중·일간 신경전이 팽팽했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3국이 단합하여 일치된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며 입장 조율에 나섰다.

    이 대통령은 "한나라라도 빠지면 안된다. 빠른 시일 내에 한목소리를 내야한다. 시간을 끌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에 원자바오 총리가 "이 대통령 의견에 공감한다"며 "3국이 긴밀하게 소통해 곧 유엔을 통해 일치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히면서 극적인 합의가 이뤄졌다. 3국 정상은 단합된 목소리로 북한에 강력한 메시지를 조속히 보내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 하고 구체적인 형식과 문안은 유엔안보리 실무자간 협의를 통해 확정짓기로 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진가를 발휘한 이 대통령의 위기관리능력은 과거 기업인 시절부터 쌓아온 다양한 협상 경험,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국가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오랜 외교실무 경험을 가진 정부 관계자는 "이 대통령의 순간적인 판단력과 순발력에 놀랐고, 나아가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이라는 예측력도 돋보였다"면서 "특히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보인 실용외교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번 아세안 회의 무산은 한 국가의 안정된 행정능력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고 말했다. 또한 "태국에서 다루지 못했던 의제는 6월 제주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서 재논의될 것"이라며 "한·아세안 관계를 더욱 부각하는 중요한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11일 오후 아피시트 총리는 우타파오 국제공항에 미리 나와 있었다. 조기 출국하는 각 정상들을 배웅하기 위해서다. 아피시트 총리는 이 대통령에게 "머무시는 동안 큰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고 사과했고, 이 대통령은 "괜찮다. 조만간 다시 볼 수 있도록 하자"면서 "6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때 다시 뵐 수 있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한 참모는 "이 대통령은 위기가 올 때마다 이를 어떻게 기회로 활용할 것인지를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