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 '동서남북'란에 이 신문 박두식 논설위원이 쓴 "여권(與圈) 말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입니다. 네티즌 여러분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올 한 해 불거진 국정(國政)과 정치 혼란의 상당수는 말(言)에서 비롯됐다. 무엇보다 정부와 여당, 즉 여권(與圈)이 자초한 경우가 많다. 가장 최근의 예가 서울 강남·서초·송파 등 3곳에 대한 투기지역 해제 문제다. 기획재정부 장관과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이 하루 전까지 "시장 원리에 따른 정상화" 운운하며 차별적 부동산 규제를 없앨 듯 이야기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이에 제동을 걸면서 당분간 '없던 일'이 됐다. 문제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대표 공약인 대운하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한쪽에선 "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다른 한편에선 "상황이 괜찮으면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정부가 '한국판 뉴딜'이라고 치켜세우는 4대강 정비 사업이 충분한 공감을 얻는 데 한계를 보이는 것도 이런 대운하 관련 발언들이 드리운 그림자 때문이다.

    정치 문제로 들어가면 점입가경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대선 후보 경쟁자였던 힐러리 상원의원을 국무장관에 임명한 후 한동안 '박근혜 역할론'이 제기됐다. 현 정권이 겪고 있는 위기를 돌파하려면 박근혜 전 대표의 협력이 필요하다며 여권 주류들이 공개적으로 거론했다. 박 전 대표의 정치적 비중과 장래를 생각한다면 조용히 성의를 다해 설득해도 성사 여부를 장담키 어려운 문제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여권 인사들이 대거 등장해 공개적으로 감 놔라 팥 놔라 해댔다. 각종 훈수와 전망, 때로는 압박하는 듯한 발언들을 쏟아냈다. 일이 풀릴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다.

    대야(對野) 관계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지난 13일 내년도 예산안 강행 처리 직후 '입법 전쟁'을 선언했다. 상대가 전쟁을 선포했는데 앉아서 패배를 기다릴 야당은 어느 나라에도 없다. 말이 오간 순서만 놓고 보면 여당이 먼저 싸움을 건 것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말의 정치에서 압권은 개각 문제다. 이 대통령은 최근 '개각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짜증을 냈다. 그런데 이 말을 먼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여당 지도부와 이른바 주류 핵심이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지난 여름부터 '연말 여권 진용 개편'을 마이크를 잡고 예고 방송을 계속했다.

    여권은 올 한 해 전체가 '노출 강박증'에 걸린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마이크 앞에만 서면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쏟아낸 것이다. 한나라당 차원에서 홍보기획본부장으로 하여금 의원들의 방송출연 문제를 총괄토록 하는 방안을 도입하기까지 했지만, 효과는 거의 없다.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은 자타가 공인하는 다변가이자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 말을 줄이려고 무척 애를 썼다. "내가 한 말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언론에 그대로 나온다. 내가 하는 실수는 국가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였다. 인터넷은커녕 TV·라디오도 없던 150년 전 링컨이 국정 책임을 맡은 사람의 말이 가져올 결과를 이렇게 걱정한 반면, 미디어 홍수 시대에 사는 한국의 현 여권 인사들은 저마다 자기 홍보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누구도 자신의 정치적 장래를 보장해줄 수 없으니 "일단 나부터 뜨고 보자"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풍토인 셈이다. 이래서는 국정이 안정될 수 없다.

    여권은 내년 초 새 출발을 기약하고 있다고 한다. 그에 앞서 올해가 가기 전에 얼마간 '묵언(默言) 수행'이라도 할 것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