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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2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창균 정치부 차장이 쓴 칼럼 '한나라당의 퇴행'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우유병을 물거나 손가락을 빨면서 어리광하는 현상을 정신분석학에선 퇴행이라 부른다. 대선에서 이겨 집권당이 되고도 퇴임한 대통령을 상대로 투쟁하면서 야당 행세를 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퇴행일 것이다. 요즘 한나라당 모습이 바로 그렇다.지난 14일 한나라당이 국정감사를 중간 점검하겠다며 소집한 회의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저인 봉하마을이 주요의제였다. 홍준표 원내대표가 "봉하마을은 국민혈세를 낭비한 대표적 사례로 쟁점화해야 한다"고 공격명령을 내리자, 황영철 원내부대표는 "봉하마을에 500억원의 예산이 지원됐다", 조윤선 대변인은 "봉하마을은 노방궁(노무현의 아방궁)"이라고 조준 사격했다. 다른 의원들도 "노 전 대통령 사저가 최소 시가 20억이 나간다는데 종부세를 3만원만 내고 있다", "골프 연습장까지 만들어놨고 지하에 아방궁을 만들어서 그 안을 볼 수가 없다" 등의 발언으로 거들었다.
한나라당은 이후 국정감사에서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반노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17일 국토해양위에선 한나라당 의원 두 명이 "부산 신항만 배후철도 노선이 당초 노선을 바꿔 봉하마을이 있는 진영을 지나게 됐다"는 해묵은 의혹을 다시 제기했다. 20일 법사위에선 한나라당 의원들이 임채진 검찰총장을 상대로 "노무현 정부 때의 권력형 비리 수사에 대해 왜 소극적이냐"고 거칠게 몰아붙였다. 요즘 정국을 달구고 있는 쌀 소득 보전 직불금 문제에 대해 한나라당이 수비에서 공격 대형으로 전환하며 국정조사를 받아들인 것도, 직불금 전선에 노 전 대통령을 끌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을 성역처럼 보호해 줘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 손보기'가 집권 여당이 챙기는 국정 리스트 맨 꼭대기에 와서는 곤란하다. 세계 경제가 70년 만의 대란을 맞고, 그 외풍 속에서 우리 경제 역시 환율, 주가가 급등락을 거듭하는 비상한 국면에선 더욱 그렇다.
어린이의 퇴행은 보통 자신이 받아온 엄마, 아빠의 애정을 새로 태어난 동생에게 빼앗겼다는 정서적 결핍감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한나라당의 퇴행 역시 '야당 때는 국민의 사랑을 받았는데, 여당이 된 후 국민들의 눈길이 싸늘해졌다'는 불안감 때문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은 국민 지지를 되찾기 위해 책임 있는 여당 역할을 잘해낼 자신은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시절, 야당 입장에서 노 대통령을 공격하고 비판하면서 "잘한다" "시원하다"는 격려를 받던 일을 떠올리며 그때 버릇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퇴행이라니, 우리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얘기냐"며 발끈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노무현 때리기'가 과거 경험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해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현재의 국민 정서를 읽는 판단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을 다시 정치 무대로 끌어내 돌팔매질하는 일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은 유권자 스펙트럼의 맨 오른쪽 소수뿐이다. 한나라당은 그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그 지지자들이 국민 정서를 대표한다고 믿고 정치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노 전 대통령은 열 달 전 대선을 통해 정치에서 퇴장했다. 노 전 대통령과 그 정치적 동지들을 대표해 출마했던 여당후보는 전체 유권자 표의 4분의 1밖에 얻지 못하는 참패를 했다. 그것으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심판은 끝났다. 일반 유권자는 물론 대다수 한나라 지지자들도 그렇게 믿고 있다.
노무현 정권에 대해 국민들이 가장 지긋지긋해했던 일 중 하나는 10년 전, 20년 전 일을 들추며 과거와 싸움을 벌였던 일이다. 한나라당은 노 전 대통령이 밟고 갔던 그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발자국을 살펴 봐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