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8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에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가 쓴 <'실용'이라는 이름의 착각>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전은 물론 집권 후에도 유달리 '실용(實用)'을 강조해왔다. 민주화 이후 출범한 정부 가운데 '중도'가 아니라 '실용'을 표방한 것은 처음이다.

    실용에는 강점이 있다. 실용을 중시했던 로마인들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실용을 얼마만큼 중시했냐는 그들이 남긴 수많은 인물 조각상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황제나 정치인들의 조각상을 많이 만들었는데, 수시로 바뀌는 정치인들로 인해 늘어나는 일손을 줄이기 위해 머리를 분리할 수 있게 만들어, 인물이 바뀔 때마다 머리만 새로 제작해 교체했다. 이런 정도의 실용이라면 국가적 이념으로 내세우지 않더라도 충분히 애교 있는 삶의 철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실용은 특별했다. 해방 공간을 방불케 할 만큼 치열했던 이념 대결이 선진화의 발목을 붙잡았다는 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일까? 실용이야말로 좌우를 아우르는 완충과 통합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념 과잉의 자연스러운 반작용으로 나온 것이 실용이다. 노무현 정부가 과거 현재 미래 등 모든 것을 이념화함으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얼마나 소모적인 갈등을 초래했던가.

    문제는 실용을 내세움으로써 실용의 '실용성'이 얼마나 제고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거 노 정부는 전적으로 좌파이념으로부터 강력한 힘을 받았다. 재·보궐 선거에서 연패하여 민심 이반이 확연해지고 언론들이 거듭된 실정(失政)에 연일 비판을 쏟아내는 상황에서도 노 전 대통령이 꿋꿋하게 '투사(鬪士)'로서의 정체성과 '코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좌파이념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는 무엇으로부터 힘을 받는가. '실용주의'로부터 힘을 받을 수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지난 5개월간 힘을 받기는커녕 힘이 빠졌을 뿐이다. 이념적 좌우를 아우르겠다며 실용을 표방한 정부가 촛불정국에서 진보연대나 민노총 및 전교조 등, 좌파로부터 '동네북'처럼 집중공격의 대상이 되어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6·3세대나 민주화 제1세대라고 밝히고 또 자신은 보수가 아니라고 강조한 대통령에 대하여 왜 좌파는 날 선 비판과 냉소로 일관해왔는가. 그것은 좌파가 정부의 실용을 '위장된 보수' 정도로 보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 수 없다. 또 우파는 우파대로 보수임을 부정한 정부에 대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탕탕평평(蕩蕩平平)'처럼 '실용'으로 좌우를 통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정부의 전략은 결과적으로 선의의 착각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그 점을 파악하지 못한 채 좌고우면(左顧右眄)으로 불확실성만 가중시켰을 뿐이다. 특히 좌파언론이 제기하는 각종 문제점들을 수용하면 좌파세력이 협조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좌파는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사·정책 문제 등 거의 모든 국정 아젠다에서 "하면 안 된다"며 몽니를 부렸고 정부는 허둥거렸다.

    그 결과 '실용'은 원칙도 없고 중심도 없는, 기회주의와 임기응변의 범주로 치부되었을 뿐이다. 이명박호(號)도 선진화라는 원래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바람 따라, 물결 따라 흔들리는 일엽편주(一葉片舟)가 되고 말았다. 국가와 사회의 기본을 바로 세우는 일부터 시작하여 신뢰와 법치회복, 사회적 갈등 조정 등 모두가 갈지자 걸음이 된 것이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새로운 60년을 향해 새 출발을 하려면 이제라도 '탈이념'이 능사(能事)가 아니라 헌법정신과 시대정신에 맞는 이념을 당당하게 제시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국민통합을 일구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헌법과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이념적 정체성을 분명히 할 때, 바로 그 이념으로부터 정부도 힘을 받고 국민들도 방향성을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