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이 쓴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아마존 열대 우림 지역의 원시 부족민들이 낮게 나는 비행기를 향해 화살과 창을 겨누고 있는 장면이었다. 외부 세계와 접촉 없이 살아가던 부족을 처음 촬영했다는데, 온몸을 붉게 칠한 그들의 얼굴엔 낯선 침입자에 대한 적의와 공포가 가득했다. 보름이 지나도록 이 사진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바로 그 원시 부족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까닭이다.

    공포는 갑자기 다가왔다. 비행기만큼이나 모호한 공포였다. 처녀림 속 원시 부족이더라도 21세기의 하늘에서 비행기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믿기 어렵다. 매일 아침 이슬 젖은 화살을 말리다 무심코 고개 든 하늘에서 수없이 마주쳤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멀리 있어 평화롭던 게 갑자기 다가오니 두려웠던 거다. 놀란 만큼 정당한 공포다. 그때 누군가 외쳤을 터다. “적이다.” 곧 비행기는 적이 됐고, 그 그림자가 커질수록 아마존 부족들의 적개심도 따라 커졌을 게 분명하다. 귀청이 따갑긴 해도 비행기는 친구가 될 수도 있을 터였다. 적이 아니라고 외친 사람도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노의 함성에 묻혔을 테고 들렸더라도 ‘정신 나간 소리’로 치부됐을 터다. 적개심이 공포만큼 정당하지 못한 이유다.

    우리의 쇠고기 공포도 그렇다. 불고기도 굽고 국도 끓이던 건데 30개월이니 뭐니 하니까 새삼 두려워진 거다. 확률이야 어쨌든 위험이 있는 건 사실이니 정당한 거다. 그걸 급식으로 먹기 싫은 여중생이나 아이에게 먹이기 싫은 유모차 엄마의 공포는 그래서 정당한 거다. 하지만 적개심은 다르다. 미국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먹는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그걸 수입하겠다는 정부에 대한, 청와대를 향하는 촛불시위대의 길을 막는 전경들을 향한, 그리고 자제를 호소하는 보수 언론을 향한 적개심은 분명 과장된 거다. 누군가 적이라고 외친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다.

    아마존 부족 사진을 자세히 보면 몸에 칠한 색깔에 차이가 있다. 남보다 짙은 붉은색이 있고 검게 칠한 사람도 있다. 계급의 차이일 수도 있고 빈부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 사회에도 다양한 이익계층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비행기를 향해 함께 화살을 날렸더라도 속내는 다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구는 나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고, 누구는 자신의 리더십을 과시하기 위해서며, 다른 누구는 남의 리더십을 가로채기 위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촛불도 색깔이 다를 수 있기에 하는 얘기다. 나와 내 가족의 건강을 염려하는 촛불도 있고, 사회에 대한 막연한 불만을 표현하기 위한 촛불도 있으며, 정체를 드러냈듯 대정부 투쟁의 빌미를 만들기 위한 촛불도 있었던 거다. 앞으로 대열에 동참할지 모를 다른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컨테이너나 덤프트럭·레미콘처럼 천정부지 유가에 대한 정당한 공포가 있는가 하면, 쇠고기 수입 반대를 내세우며 야구 타순 돌리듯 파업을 잇겠다는 노동단체의 적개심도 있다. 무승부 없이 끝장을 보는 프로야구처럼 연말까지 이어질 테니 하투(夏鬪)라 부르지 말라는 그들의 주장이 어찌 나와 가족을 지키려는 촛불과 닮을 수 있으랴.

    어쩌면 나 자신이 세상의 흐름에 거슬러 화살을 겨누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거다. 처녀림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문명사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가장 어두운 시간은 해 뜨기 직전’이라는 스페인 속담이 있다. 정치는 실종됐고 경제는 엉망이라서 사회가 캄캄하지만 조금만 더 냉정해지면 곧 아침이 올 거란 얘기다. 그렇지 못하고 끝장으로 치닫는다면 그건 비행기에 쏘는 화살 정도가 아니다. 끔찍하지만 그때를 예고하는 속담이 사하라 사막의 부족들에게 있다. ‘사람들은 오아시스의 야자나무들이 지평선 끝에 보일 때 목말라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