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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6일 오피니언면 '삶과문화'에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가 쓴 ‘쇼를 하라 쇼’ 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인간만큼 ‘쇼’에 열광하는 존재가 있을까. 재미없는 세상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문명을 가진 이래 인간은 ‘쇼’를 만들고 쇼를 소비해 왔다. 즐거워야 하니까.
재미를 소비하는 숙명을 가진 인간의 속성은 그동안 이 ‘쇼’의 품질을 끊임없이 향상시켰다. 원시적 춤 동작에서 연극·뮤지컬·드라마·영화로까지 진화된 현대적 의미의 이 쇼의 해부학적 실체는 한마디로 허구의 조합이다.
역설적인 것은 이 거짓들인 허구가 모여서 사람들을 울리고 웃긴다.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이 통계와 합리를 무기로 한 그 어떤 설득보다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터이다. 어디 연극·영화에서뿐이랴. 정치가의 ‘쇼’에서 만들어진 감동 어린 메시지도 국민을 휘어잡는다. 그러나 정교하게 ‘잘’ 만들어져야 한다는 전제가 주어졌을 때의 이야기다.
‘쇼’를 잘 만들어 내는 정치가로는 조선조 정조만 한 임금도 없을 것이다. 수원 화성 행차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구경거리다. 이 중 정조의 어가행렬이 지지부진했다고 해서 유래된 ‘지지대 고개’에서의 ‘빅 쇼’는 화성 행차의 하이라이트다. 지금은 빼곡한 건물 때문에 당시의 지형을 찾아볼 수 없지만 나지막한 구릉지대를 사이에 끼고 지나가는 이 고개에서 펼쳐진 화려한 구경거리를 백성들이 놓칠 리 없다. 구름처럼 운집한 백성들을 본 정조는 이를 정치적 감각으로 활용했다. 기왕에 직접적 지지기반을 구축하고 개혁적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그였다. ‘멈춰라’를 반복하며 멀리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화산을 향해 효심의 낙루를 떨어뜨리는 군주의 ‘쇼맨십’ 앞에서 도열한 백성들은 비장한 전율을 맛봤을 것이다. 정조는 매스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대에 이미 구전(口傳) 마케팅의 원리를 꿰뚫고 있는 명군 지도자였다. 가마에서 내려 울고 또 절하는 모습을 본 민초들의 심정은 어떠하였겠는가. 맞는 가설일지는 모르지만 유교사회에서 효(孝)의 끝간 데는 충(忠)이다. 만백성은 군주의 지극한 효심 앞에서 우러나온 충성을 다짐했을 것이다. 민심이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권신들이 감히 딴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소수파의 추대로 임금이 된 사람으로 불안한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펼쳐지는 ‘빅 쇼’는 66회의 화성 행차기간 중 계속됐다. 수천의 인마가 동원된 행차의 비용은 비쌌지만 이 쇼를 통해 잠재적 적대세력인 기득권 세력도 슬그머니 무릎을 꿇었다.
이러한 통치자의 쇼 생산력을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지나 쇼로 국민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권자에 대한 모독’으로 평가절하했다.
노 대통령은 ‘민생 현장에서 (대통령이 행차하여) 전시행정을 펼치는 것은 제왕처럼 행세하려는 위선’이라고까지 단언했다. 대통령선거 때, 쇼에 가까운 잘 만들어진 광고 ‘노무현의 눈물’로 재미를 본 노 대통령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임기 중 쇼의 정치사회학적 의미를 완강히 거부했다.
‘사진만 찍기 위해서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한 노 대통령의 솔직한 진정성은 사진만 찍고 온 그간의 통치자보다 국가 안보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상 민심을 흉흉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민심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비록 사진만 찍고 왔더라도 드라마의 감동처럼 ‘쇼’를 통해 생산된 ‘국가 안보를 염원하는’ 지도자의 메시지다.
그런 뜻에서 요즈음 대통령 당선인의 직선적 속내를 실천해 내는 진정성 앞에서 사람들은 우려를 금치 못한다. 선거 때 조직적 지원과 지지를 보내준 특정 대학 동문행사에 당선 직후 두 번씩 찾아가 감사하는 과잉된 모습은 세간의 관점으로는 왠지 잘못 만들어진 드라마다. 이왕이면 거꾸로 방송대 동문회를 찾아가서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힘은 바쁜 사회생활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배움에 대한 열망’이었다고 말했다면 어떠했을까. ‘쇼를 하라 쇼’. 쇼에 울고 웃는 시대, 때로는 잘 만들어진 통치자의 ‘쇼’도 국민을 즐겁고 행복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