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송희영 논설실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다국적 금융회사 J.P 모건의 역사를 정리한 책에 재미있는 일화가 나온다.

    미국 최강의 금융 왕국을 건설했던 피어폰트 모건(Morgan)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Roosevelt) 대통령이 퇴임 후 아프리카로 사파리 여행을 떠난다는 얘기를 어느 날 들었다. 모건은 즉각 ‘대통령을 처음 만나는 사자가 자기 몫을 제대로 해주기를 바란다’고 퍼부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모건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전 때 모건은 당시로서는 큰돈인 15만 달러나 헌납했으나, 대통령은 ‘거대한 부(富)의 해악’을 공박하며 재벌 개혁을 추진했다.

    퇴임 대통령을 저주하는 발언과 정반대되는 에피소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갖고 있다. GE를 키운 잭 웰치(Welch) 전 회장은 자서전에서 9살 때 겪은 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어머니는 주방의 다리미판 앞에 서서 아버지 셔츠를 다림질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맙소사, 루스벨트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는구나.”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통령의 죽음에 어머니가 그토록 상심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웰치는 18년 후 케네디가 암살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어머니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두 루스벨트는 문어발 재벌이나 독점 자본에는 비판적이었고, 있는 자들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자극해 선거전에서 표를 모았다. 재벌을 견제하려고 정부 권한을 강화한 철학도 엇비슷했다. 그래서 뉴욕 상류층 출신인 이들에게 ‘계급의 배신자’라는 딱지가 붙여졌다. 그러면서도 뒤로는 부자들로부터 선거 자금을 조달해 쓰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타일은 달랐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예고없이 재벌을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기도 했으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포드 가문에 엄청난 상속세를 물릴 때 공개적으로 국회에서 토론하고 법을 만드는 과정을 거쳤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쇼맨십이 강했다. 재벌들을 백악관 만찬에 초대,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손가락질하며 “우리가 하는 일을 방해한다면 내 뒤를 이을 사람이 결국 당신네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협박했다. 있는 자에 대한 반감에 한껏 영합했다. 하지만 서민 형편이 좋아지거나 빈부 격차가 축소되지는 않았고, 있는 계층의 반발만 높아 갔다.

    반면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 등으로 낙오(落伍) 계층에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쪽이었다. 대공황의 처참한 쓰레기 더미 속에서 중산층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였고, 민주당의 정강 정책도 제 모습을 갖추었다. ‘가진 자 때리기’보다는 ‘못 가진 자 살리기’에 더 역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엊그제 여당의 정동영 후보가 “여러분은 20%만 잘살고 80%는 버려지는 사회를 원하나”고 반문하며 한나라당 식의 정글 자본주의를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뒤처진 계층의 상처에 소금을 짓이겨 넣는 강렬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경제계에서는 ‘노 대통령이 또 출마했는가’고 냉소적인 농담을 주고받는다. 5년 내내 강남과 가진 자를 때렸지만, 그 덕에 서민 경제가 좋아졌다는 평가는커녕 도리어 파탄시켰다고 공격받는 노 대통령과 똑같은 공략법이라는 얘기다.

    사실 노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20%대 80%의 대결이 아니라, 어쩌면 10%대 90%로 격차가 벌어지는 분위기다.

    예를 들어 대형 할인점이 들어선 도시에서는 주변 점포가 쑥대밭으로 변하는 ‘이마트 쓰나미 현상’이 자리 잡았다. 홀로 승자가 되고, 나머지는 패잔병이 되는 게임이다. 소득 격차뿐만 아니라 자산 격차, 학력 격차, 직장 격차 등 많은 분야에서 격차는 훨씬 뚜렷해졌다.

    현실이 이럴진대 정 후보가 소수의 승자 쪽을 조준, 폭탄을 투하할 듯이 선동한다면 이 정권의 실패까지 복제하려는지 모른다.

    누가 정권을 잡든 뒤처진 세력, 무너진 중산층, 문 닫은 자영업자들을 상대로 집중적으로 부활 대책을 추진해야 하지만, 동시에 프랑스 보르도에 포도밭을 소유하거나 자가용 비행기로 바캉스 가는 큰 부자도 많이 탄생시켜야 한다. 평범한 한국인이라면 퇴임 대통령이 사자 먹잇감이 되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의 죽음에 눈물이 핑 도는 순간을 간직하고 싶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