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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2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백화종 편집인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우리나라 어지간한 산들은 대개 9부 능선쯤에 깔딱고개라는 걸 갖고 있다. 정상에 이르기 전 막바지에 숨이 깔딱거릴 정도의 가파른 언덕이 버티고 있다는 얘기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등반사를 보면 8700m 이상을 오르고도 정상 전 100m 미만 지점에서 조난하거나 정상 정복을 포기해야 했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 선정을 위한 1년여의 대장정이 종착점에 이르렀다. 그동안 한나라당(또는 그 전신)에서 몇 차례 대선 후보 경선이 있었으나 (구)여권의 지리멸렬로 당내 예선이 곧 본선이라는 인식과 맞물려 이번 경선이 가장 치열한 싸움이 됐다. 오늘, 그러니까 20일 오후 환호할 후보 당선자는 그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9부 능선을 넘은 셈이다.
이번 경선은 그 치열함 때문인지 정책 대결 대신 네거티브 캠페인이 주를 이뤄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이명박 후보의 재산 관련, 박근혜 후보의 최태민씨 관련 의혹 등이 제기만 됐을 뿐 그 실체가 밝혀진 건 거의 없었다.
극심한 네거티브 캠페인은 자연스럽게 여러 후유증을 낳았다. 상대에 대한 저주와 소송까지 난무함으로써 두 진영 사이에 메우기 힘든 감정의 골이 파였다. 또 상대 후보에 대해 의혹 제기와 함께 본선 필패론을 폄으로써 후보 당선자는 본선에서 이를 극복해야 하는 부담까지 안게 됐다. 때문에 예선만 넘기면 청와대 입성은 통과의례에 불과할 줄 알았던 한나라당 후보의 본선 낙관론도 적잖이 퇴색하고 있다.
우선, 두 예비 후보는 모두 경선 결과에 승복하겠다고 다짐했으나 두 진영의 화학적 결합이 쉬워보이진 않는다. 후보 당선자야 본선 승리를 위해 상대 진영 인사들도 모두 포용하고 싶겠지만 감정이 격해져 있는데다 밥그릇 싸움을 해야 하는 참모들 입장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골을 어떻게 메우느냐로 후보 당선자는 1차 지도력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다음, 후보 당선자는 각종 의혹을 해소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경선 과정에서 제기된 의혹들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본선에서는 더 많은 의혹이 훨씬 더 거칠게 제기될 것이다. 상대가 정권 쪽이라는 점에서 예선에서처럼 ‘음모’로 일축하며 적당히 넘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후보 당선자로선 상대방, 즉 낙선자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을 이쪽 지지로 돌리는 일이 가장 큰 관건일 것이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두 예비 후보의 지지자들 가운데 절반 안팎이 지지 후보가 낙선할 경우 본선에서 다른 당 후보를 찍을 의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지지 정당까지 바꿀지는 의문이지만 상당수가 정말 여권 후보를 찍거나 기권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물론 두 진영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다 해도 아직은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 지지율이 높다는 점, 정치적 명분, 법적 제약 등 때문에 분당 등으로까지 사태가 악화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승자 쪽에서 패자 쪽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하거나, 후보 당선자의 치명적 흠이 드러나 당선이 어렵다는 관측이 나올 경우 패자 진영에선 판을 새로 짜볼까 하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또 (구)여권이 계속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여 선거가 선거답지 않게 진행된다면 거꾸로 패자의 미련이 커질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진행된다면 그 유혹의 강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고.
이제 후보 당선자는 9부 능선을 넘어 정상을 눈앞에 두고 있으며 한나라당은 대선의 주도권을 잡고 독립변수가 된 셈이다. 해서 지금까진 한나라당이 집권세력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을 취해 왔으나 이제부턴 역으로 한나라당과 후보의 행태에 따라 (구)여권이 반사이익을 취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 한나라당과 9부 능선을 넘은 대선 후보의 뒷심을 지켜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