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6일자 오피니언면 '동서남북'에 이 신문 강인선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004년 1월 미국 아이오와주(州)에서 민주당 경선의 막이 올랐다. 찬바람이 씽씽 부는 아이오와주에 뜨거운 경선 바람이 불어 닥쳤다. 공화당은 부시(Bush)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하기로 했기 때문에 경선을 할 필요가 없었다. 경선무대는 완전히 민주당 차지였다. 오랜만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한 민주당은 신이 나서 기세등등했다.

    주도(州都)인 디모인시(市)는 마치 선거박람회장 같았다. 길모퉁이 카페에는 내로라하는 민주당 전략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모여 앉아 선거전략을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식당에 들어가면 TV에서만 보던 정치토크쇼 진행자들이 밥을 먹으며 회의 중이었다. 휴가를 내서 똑같은 티셔츠를 맞춰 입고 아이오와로 몰려든 다른 지역 지지자들도 보였다. 곳곳에서 각 후보를 위한 화려한 지지행사가 열렸다.

    이런 방식의 경선이 미국에서 자리잡은 지는 40년이 안 된다. 한 번 할 때마다 ‘더 고되고, 더 복잡하고, 더 비용이 많이 드는’ 경쟁으로 변해, 본선보다 더 어렵다는 말까지 나온다. 경선에서 힘을 덜 빼고 돈도 덜 쓰고 흠집이 덜 나는 전략을 구사해야 본선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할 정도다.

    당시 아이오와주에서 열렬하게 끓어오르는 수면 아래로는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이를 악물고 귀를 막은 채 민주당 축제가 돼 버린 경선시즌을 견디고 있었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마치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날뛸 때, 공화당 지지자들은 “대통령에게 퍼붓는 험한 소리 듣기 싫어 미치겠다”, “본선 때 보자”, “표로 내 뜻을 알려주마”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민주당의 첫 경선 결과는 그때까지 선두를 달리던 하워드 딘(Dean) 후보의 참패였다. 전국의 경선이 모두 끝나야 공식결과가 나오지만, 첫 승부가 대세를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딘은 2등도 아닌 가망 없는 3등이었다. 멀리 텍사스주에서 버스를 대절해 밤낮으로 달려 아이오와주에 도착해 딘의 유세를 도왔던 한 할머니는 “딘이 1등을 해야 본선에서 공화당을 물리칠 수 있을 텐데…”라며 울먹이다가, “그래도 민주당이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로부터 약 5개월 후 보스턴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전국 경선에서 승리한 존 케리(Kerry)를 대선후보로 지명하는 자리였다. 전당대회엔 민주당 출신 전직 대통령과 당 지도자들, 그리고 경선에서 케리와 치열하게 경쟁했던 후보들도 모두 나와 케리를 지지했다. 후보들끼리 네거티브 선거전까지 벌여 가며 다신 안 볼 것처럼 싸운 후였다.

    이 일상화된 미국 대선의 한 장면이 아주 낯설었다. 역대 한국 대선에서 경선을 거부하고 탈당하든지, 경선 패배 후에 독자출마를 하거나 탈당해 버리는 사례를 봐 왔기 때문일 것이다. 싸울 땐 죽기 살기로 싸우더라도 뭉칠 땐 또 뭉치는 당 분위기와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경선 승자를 돕는 후보들의 태도가 새롭다 못해 낯설 수밖에 없었다.

    사실 멋있는 승자가 되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승자가 할 일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정당당하고 의연한 패자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패자에겐 규정된 의무나 책임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탈당은 못해도 수수방관할 자유는 있는 것이다. 어느 정치학자는 “내가 원하는 가치를 상대가 차지할 수도 있다는 것을 괴롭더라도 받아들일 줄 아는 유치한 단계가 자리잡아야 비로소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고 했다.

    이번 주만 지나면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결정된다. 가장 기다려지는 장면은 패자의 대응이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승자가 아니라 ‘패자 하기 나름’이라는 말을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