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의해 억류된 한국인 피랍자들로 인해 한국사회에 내재되어 있던 반미논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외견상 논란의 요지는 납치된 동맹국의 국민을 구출하는데 있어 미국이 보여주는 소극적 자세와 연관되어 있다. 미국이 피랍된 인질을 석방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은 탈레반 정권의 축출 과정에서 보여준 미국의 주도적 역할을 근거로 하고 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나토를 중심으로 한 다국적 연합군의 사령탑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탈레반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실질적 권한을 소유하고 있는 미국이 인질과 탈레반 포로의 맞교환을 거부함으로써 사건이 장기화되고 인질의 생명이 위협 받고 있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일면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질의 조기석방과 이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미국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과 미국의 책임을 물어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 자체를 부정하는 것 사이에는 접점을 찾기 힘든 정치적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다. 전자가 인권이라는 인도주의적이고 규범적 차원에서의 접근을 강조하고 있다면 후자는 한 국가가 수행하는 대외정책의 근본적 변화와 수정을 촉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제정치적인 시각에서 볼 때 제로섬 게임을 진행하는 두 개의 정치세력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규범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요구 때문에 어느 하나의 정치세력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예를 찾기는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현재 미국과 탈레반의 대결이 승자가 모든 결과물을 독식하는 게임의 형태를 띠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한국이 채택할 수 있는 협상카드의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은 오랜 기간 동맹관계를 유지해왔고 이는 냉전이 치열했던 시기에 한국의 안보를 보장해주는 버팀목 역할을 했다. 물론 동맹관계라고 해서 두 나라 관계가 언제나 안정적이고 상호 협력적인 관계만을 유지하라는 법은 없다. 큰 틀에서는 동맹관계를 유지하더라도 사안에 따라 협상과 갈등 국면이 조성되는 것은 국가간 이익을 근본으로 하는 국제정치에서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국가간에 적절한 합의도출이 어려운 상황에서 타국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위와 집회를 개최하고 각종 이익단체가 자국 정부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는 행위는 전략적 차원에서 자국의 이익 추구에 힘을 보태주는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정치가와 시민단체들이 인질석방을 위해 미국의 전향적인 자세를 촉구하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이다.

    하지만 피랍사건을 계기로 일부에서 거론되고 있는 미국의 “원죄론”과 책임론은 납치된 인질을 석방시키기 위한 외교적 차원의 압력을 넘어 반미기운을 확산시키기 위한 감정적 선동과 선전의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피랍사건을 “제2의 미선이 효순이” 사건으로 규정하려 하거나 탈레반을 일제시대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 동일시하려는 움직임 내지는 한미동맹을 미국만을 위한 동맹으로 간주하는 등 허황된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 발생하는 국가간 안보협력과 경제적 상호의존 같은 모든 정치행위는 행위주체간 상호이익을 전제로 추진되는 것이다. 만약 비적대적 세력간의 동맹과 상호의존이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이익창출로 귀결된다면 이들 국가간에 정상적인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한미간에 놓여있는 근본적 이해의 중요성과 아프가니스탄이 한국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피랍사건에 임하는 미국의 소극적 역할을 반미주의로 확산시키려는 정치세력이 빠져있는 소아병적 유치함의 심각성이 입증되고도 남음이 있다.

    세계화의 물결이 높아지면서 국제정치경제 질서는 더욱 복잡해지고 국가간 상호의존의 폭과 깊이 또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는 국제정치질서에서 어떤 특정국가의 이익만을 보장하기 위한 일방통행의 가능성이 줄어들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간 발생하는 정치의 동학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권위주의 정권 시절 외치던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80년대식 반미주장만을 되풀이하는 행위는 결국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고립시키고 사회를 분열과 대립의 장으로 끌고 가는 퇴행적인 기능 밖에 수행할 수 없음을 상투적인 반미주의자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객원 칼럼니스트의 칼럼은 뉴데일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