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8일 오피니언면에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가 쓴 시론 <"선생님, 주중해 주십시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책임 있는 정치인으로서 잘 판단해서 하라”는 아버지의 훈수를 받들어 김홍업 의원은 민주당을 탈당하고 ‘11글자 신당’의 대열에 합류했다. 불과 4개월 전 세습정치에 대한 당 내외의 거센 비판과 반발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그에게 ‘전략공천’이란 특전을 베풀었다. 그 역시 “민주당이 더욱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는 당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박상천 대표가 배신행위라고 반발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책임이란 말은 천만금의 무게를 지닌다. 자신을 선택해 준 유권자의 뜻을 존중하고 자신의 언행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는 대의정치의 원활한 작동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런데 김씨 부자(父子)가 생각하는 책임은 이와는 전혀 다른 것 같다. ‘무조건 통합’보다 ‘독자노선’을 선호하는 당원들이 70%에 이른다는 조사결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합의 밀알이 되기 위한 탈당’을 ‘책임 있는 행동’으로 치켜세우고 있으니, 그들에게 책임이란 ‘내 멋대로’의 동의어쯤 되는 모양이다.

    박정희가 산업화의 아이콘이라면, 김대중은 민주화의 아이콘이다. 그런데 그가 책임정치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끊임없이 훼손하고 있다. 이제 DJ는 ‘무(無)호남 무(無)국가’라며 엷어져 가는 호남인들의 지역감정을 자극할 것이 아니라, ‘무(無)책임정치 무(無)민주주의’를 되새기며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는 우(愚)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DJ는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한 ‘범여권 대통합’이 ‘국민의 뜻’임을 무척 강조한다. 그러나 광주·전남 거주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전남일보의 18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아도 상관없다”는 응답이 43%로 그 반대의 27%를 훨씬 상회한다. 백번 양보하여 “양당 정치 복원이 곧 민주주의의 발전”, “대선은 일대일 구도가 돼야 국민이 좋다”, “무조건 통합하라”는 DJ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DJ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최근 밝혀진 1987년 6·29선언의 진실을 살펴보면, 당시 민정당은 DJ의 독자출마로 노태우의 승리가 가능할 것이라는 계산에서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DJ는 ‘4자 필승론’으로 민정당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한나라당 집권 저지라는 2007년의 대의명분은 군정 종식과 문민정권 창출이라는 1987년의 대의명분과 굳이 비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양식 있는 지성인이라면 최소한 20년 전의 분열행위에 대한 고해성사를 선행해야 하지 않을까.

    수평적인 정권교체는 한국 민주화가 이루어 낸 금자탑이다. DJ는 그 최초의 수혜자다. 그런 그가 ‘사생결단’ 운운하며 갖은 무리를 해서라도 정권교체를 막으려는 것은 논리적인 것을 좋아하는 평소 그의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뭔가 구린 게 있어 저러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지는 것이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DJ의 논리가 “반보수대연합을 결성하여 한나라당의 집권야욕을 분쇄해야 한다”는 김정일의 논리와 묘하게도 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6·15 공동선언의 두 주역이 ‘정권교체 반대 민족공조’를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민주화의 아이콘인 DJ와 수령 절대주의 세습체제의 후계자가 비슷한 논조로 정권교체를 결사 저지하려는 오늘의 현실, 우리는 여기서 한반도 정치의 모순성과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극복과제를 접하게 된다.

    얼마 전 한 노(老)정객이 얘기해 준 바에 의하면, 정치인의 노화는 노욕(老慾)-노탐(老貪)-노추(老醜)-노망(老妄)의 4단계로 진행된다고 한다. 엊그제 DJ의 동교동 자택 앞에서 한 열혈 민주당원은 “선생님, 자중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이 말이 DJ의 마음을 움직여 그의 노화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