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4일자 오피니언면에 언론인 류근일씨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를 대통령 자리에 앉힌 것이 누구인가? 바로 유권자들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매사 정치인 탓으로 돌릴 때가 아니다. 유권자 자신들이 또 손가락 자를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제정신 바짝 차리는 것이 더 절실한 시점이다. 이것이 ‘2007 대선’의 가장 핵심적인 관건일 것이다.

    여기서 ‘유권자’란, 항심(恒心) 없이 이리 쏠렸다 저리 쏠렸다 하는 일부 줏대 없는 대중을 의미한다. 잘됐건 잘못됐건 일관된 신념과 논리를 견지한 채 “나는 누가 뭐래도…”라고 천명하는 꼿꼿한 유권자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따지고 자시고 할 일이 없다. 문제는 어느 한 순간의 들뜬 기분으로 누구를 덜컥 찍었다가 불과 반년도 못 돼 “잘못 찍었다” 어쩌고 하면서 제 손가락 자르는 ‘무책임한 대중’ ‘생각 없는 대중’이다.

    옛날 절대 다수 유권자들이 문맹(文盲)이거나 무식했을 때는 대중의 헷갈림이나 오판은 그들 탓이라기보다는, 사기 치는 정치인들 탓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들 배운 만큼 배운 사람들 아닌가. 비싼 돈 들여 공부하고 교육 받고서도 불과 반년 만에 발등을 찍으며 후회할 투표를 한다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변호할 수 없다.

    이런 ‘학교 다닌 무식꾼’들의 역기능은 서양에서는 1879년의 영국의 ‘교육법(Education Act of 1879)’ 제정 이래 뜻있는 지식인들의 걱정거리다 못해 아예 공포의 주제였다. 교육의 문호가 널리 개방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결과 ‘학교 다닌 무식꾼’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독자(讀者)와 관중(觀衆)이 엄청나게 양산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데일리 메일(Daily Mail) 같은 선정적 미디어와 그것에 중독된 군중의 허상(虛像)이 진짜 지식세계를 압도하는 ‘신판 중세기’가 도래했다는 비관론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 ‘고민하는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좀 심하게 앓던 사람들은 1930년대의 대중적 무의미성의 시대를 ‘문명의 죽음’이라고까지 극언했다. T S 엘리엇은 “런던 브리지에 수많은 군중이 넘쳐흘러/ 죽음이 이렇게까지 많이 덮쳤을 줄은…”이라고 개탄했고, 조지 오웰은 “나의 시(詩)는 죽었다/ 당신도 죽고 나도 죽었기에/ 우리는 모두 죽은 세상의 죽은 자들이다/ 저 핏빛 집들과 그 안에 있는 아무 의미 없는 군상(群像)들을 보라”고 절규했다. 대중사회의 지성의 고갈과 겉핥기 세태를 극단적으로 아파했던 일부 지식인들의 절망적 비명이었던 셈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런 대중현상의 활화산이 온 사회를 뒤덮어 왔다. 법질서를 무시하는 막무가내 ‘몸싸움 대중’, 선동가와 동영상과 군중집회의 최면술에 걸려 우르르 내닫는 ‘중우(衆愚)’, 개인과 개인의 집합으로서의 대중 아닌, 비인격화(dehumanized) 된 거대한 도구적 대중의 출현이 그런 것들이었다.

    ‘노무현 시대’는 그래서 ‘좌파’이기 이전에 J B 프리스틀리(Priestley)가 말한 ‘애드매스(admass)’가 띄워 준 3류 선정물(煽情物)이었던 것이다. ‘애드매스’란 광고 시스템, 대중매체, 반(反)지성적 세태가 만들어 내는 ‘대중 마인드(mass mind)’를 일컫기 위해 그가 쓴 신조어였다.

    ‘애드매스’의 출현은 물론 불가피한 추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이제는 ‘노무현, 김대업 장단’에 춤추어 준 결과가 과연 어땠는지, 그리고 그 책임에서 자신들이 과연 면제될 수 있을 것인지를 솔직하게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개 찍고 이민 갔다’는 평판을 계속 또 듣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거북한 노릇 아니겠는가.